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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OVERY] 대(大)호남평야 ‘방랑적(的)’ 대(大)종주

바이크조선 | 2015.12.08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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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공주역~정읍역 130㎞

국내에서 가장 넓은 들판인 호남평야를 김제 일원으로만 알기 쉬운데 실제 평야지형은 계룡산 부근부터 고창까지 직선거리로 100㎞나 펼쳐져 있다. 이 광대한 평야를 편의상 ‘大호남평야’라고 부르자. 이 길고 넓은 평야의 한가운데를 따라 지평선 찾아, 길 찾아 이틀간 130㎞를 방랑했다. 국내에서도 광야의 방황이 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경유 코스

공주역  →  광석면  →  논산시  →  논산천  →  강경읍(옥녀봉)  →  함열역(서쪽 들판)  →  익산시(1박, 배산 연주정)  →  만경강 건넘(만경2교)  →  만경강 둑길(西進)  → 만경읍   →  진봉면  →  김제 죽산  →  동진강(군포교 건넘)  →  동진강 둑길(東進)  →  정읍천(南進)  →  정읍역  130㎞, 쉬엄쉬엄 12시간 소요

지평선을 향해 소실점으로 모아드는 들길. 그러나 맑은 대기로 저 멀리 산이 보인다. 김제 진봉면 상궐리에서

그렇지 않아도 쓸쓸한 가을인데 나이까지 지천명(知天命) 고개를 넘다니…. 그냥 잠깐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훌훌 털고 떠나고 싶었다. 그렇다고 낯선 도시는 절대 아니고, 울적함을 더해줄 것만 같은 첩첩산중의 고적함도 내키지 않았다. 이번에 떠오른 곳은 광야(廣野)다. 산들은 저 멀리 물러나고 지평선이 가물거리는 그런 엄청난 들판을 활개 치며 달리고 싶었다. 그런 대평원에서는 눈치 볼 것 없이 함성을 질러도 좋고, 마음 속 깊은 흉금을 털어 놓아도 대양의 파문처럼 금방 잦아들어 묻혀버릴 것이다. 가끔씩 광야의 갈증에 유독 목말라 하는 내 몸은 2천 년 전 이 땅으로 이주해온 북방 기마민족의 유전자가 활성화되어 그 옛날의 고향을 그리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광야를 찾아 만주 벌판이나 시베리아를 찾을 것인가. 이 땅에는 그런 곳이 없을까. 온통 산뿐이라고 알고 있는 이 땅이지만 그런 광야가 있기는 하다. 바로 호남평야다.

대(大)호남평야의 재발견

호남평야를 말 그대로 호남지방 일부에 국한된, 김제평야 정도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들판은 그보다 훨씬 넓다. 위성사진을 보면 계룡산 서쪽부터 시작해 고창까지가 거의 하나의 장대한 평야로 이어져 있다. 직선거리로 남북 100㎞에 달하고, 가장 넓은 동서(東西)는 군산~전주 간 50㎞ 정도 되는, 엄청난 광야다. 물론 남북 2000㎞, 동서 1000㎞ 정도의 미국 대평원(프레리) 같은 곳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이 정도라면 광야에 대한 갈증을 충분히 풀어줄 수 있다.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도 바로 여기다. 공주에서 고창에 이르는 이 광야를 나름대로 ‘大호남평야’라고 부르기로 한다. 지리학적으로는 논산평야, 김제평야, 정읍평야 등등으로 나뉘지만 딱히 경계선을 그을 수 없는 하나의 광야인 것은 분명하다.

대호남평야 종주의 출발점인 공주역에는 아침 9시 도착했다. 호남선 KTX 산천호는 와인 컬러가 우아하다.

사실, 나 역시 이 광야의 규모를 실감하지 못하다가 지난 4월 KTX 호남선을 타보고는 처음 깨달았다. 초고속으로 질주하는 KTX는 선로가 최대한 직선을 이뤄야 하기 때문에 평지에서는 가능하면 들판 한가운데를 달리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호남선 KTX는 정확히 호남평야의 중심을 거의 직선으로 지난다. 서울에서 남행할 경우, 공주역부터 시작되는 광야는 정읍역까지 계속 되었다. 차창 밖으로 아득히 펼쳐진 들판을 보면서 언젠가는 자전거로 저 광야를 달려봐야지 하고 다짐했던 것이다. 시기도 정했다. 들판에 가득한 벼논이 황금빛으로 변하는 10월 초 어느 날로 말이다.

코스나 일정? 그런 건 개의치 않기로 했다. KTX로 공주역까지 가서 가능하면 들판 한가운데로 정처 없는 방랑을 하며 정읍역까지 갈 생각이다. 만약 이 글을 보고 같은 길을 가고 싶다면 우선 ‘같은 길’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먼저 밝히고 싶다. 중간중간 기착지만 정해서 남하하면 그뿐이다. 길은 비교적 한적한 지방도와 농로를 이용할 것이다. 그래서 테마를 ‘방랑的 大종주’로 잡았다. 방랑은 기약도, 정처도 없기에 불안을 동반한다. 이런 ‘불안’이 미심쩍고 불안하다면 이 광야의 대종주는 불가능하다.

공주역에서 들판 따라 남으로 남으로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공주역에 내리자 조금 막막했다. 아무리 방랑이라도 대평야를 종주한다는 목적은 있기에 중간 기착지를 잡았다. 대략 잡은 코스는 공주역→논산시→강경읍→함열읍→익산시→만경읍→김제 죽산→동진강→정읍천→정읍역 이다. 도상거리로 120㎞이니 실제는 더 될 것이다. 시간은 이틀을 잡았는데 어디서 잘 건지는 정하지 않았다. 발길 닿는 대로, 시간 되는대로 가다가 해가 뉘엿해지면 적당한 곳에서 묵을 것이다.

논산천을 지나다 만난 KTX. 길이가 9315m나 되는 정지고가가 끝없이 장대하다.

자전거는 KTX에 휴대하기 편한 접이식 미니벨로를 택했다. 산악자전거를 가져갈까 고민하다가 열차 휴대가 번거로울 것 같아 결국 미니벨로를 골랐는데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었다. 짐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배낭에는 하루치 속옷과 기본 공구만 넣었다.

정말 드문 일이었다. 광대한 들판 한가운데서 나는 수없이 길을 갈팡질팡 했다. 들판은 바둑판처럼 잘 정리되어 있고, 그 사이로는 시멘트로 말끔히 포장된 농로가 격자형으로 나 있지만 때로는 강에 막히기도 하고, 때로는 잡초와 빗물로 엉망인 비포장길이 막아서기도 했다. 그래도 아무 걱정 없이 느긋했다. 어떻게든 남으로만 가면 되고, 길은 수없이 이어져 있으니까. 급할 것도 없었다. 정읍역에서 내일 밤차만 타면 되니까. 정해진 코스와 일정에 따라 정확하게 기계처럼 움직여왔던 지금까지의 여정이 반성되기도 했다. 인생은 어차피 마음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도 방랑적일 때 가장 흥미롭고, 자연이든 내면이든 한결 깊은 대화와 공감이 가능하다.

강경 옥녀봉에서 바라본 부여 방면의 금강. 외줄기 자전거길이 동반하는, 아름답고 나른한 풍경이다.

그런데 광야에서 방향을 잃고 방황하고 싶던 내 본심은 뜻밖에 너무나 맑고 깨끗한 날씨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아무리 넓다 해도 시야의 끝에는 높은 산이 걸리기 마련인데, 나는 그 산들을 쉽게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내가 펴낸 <한번쯤은 꼭 가봐야 할 한국의 전망대 여행> 취재를 위해서도 전국의 전망 포인트를 많이 답사했지만 20년 이상 방방곡곡을 누비며 온갖 여행서와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국토의 산야가 눈에 익어버린 것이다. 계룡산(845m)과 대둔산(878m)은 내내 동쪽으로 선명했고, 남쪽으로는 멀리 익산 미륵산(430m)이 방향타가 되어 주었다. 지도를 보지 않아도 내 위치가 어림짐작 되었다. 그 참, 나는 이 광야에서도 완전한 방랑이 어렵다니…. 역시 너무 많이 알아도 병이 되는구나.

김제에는 광야를 뜻하는 지명이 많다. 대야, 광활, 만경 그리고 지평선로까지. 진봉면 702번 지방도

강경읍에 도착해서는 강변에 도드라진 옥녀봉을 올랐다. 그 아래 금강 자전거길을 여러번 지났지만 시간과 목표의식에 쫓겨 해발 50m도 되지 않는 이 낮은 봉우리에 오를 여유가 없었는데, 이제야 올라본다. 정상의 느티나무 아래서 간식을 들며 부여 방면으로 구비치는 금강 줄기의 나른한 풍경을 여유롭게 감상한다. 가끔씩 홀로 지나는 자전거가 외로운 점이 된다.

아침 9시쯤 공주역을 출발했는데 함열을 지나니 3시가 가깝다. 주행거리는 50㎞ 남짓. 정말 지지부진이다. 그럼 익산쯤에서 자야할까 싶어진다. 익산 서쪽을 지나면서 시내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다 한순간에 나는 시내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시내 북쪽에 오똑 솟은 멋진 전망대가 있어서 꼭 올라봐야겠다는 충동이 일었기 때문이다. 저곳에 올라 지금까지 왔고, 앞으로 가야할 광야를 한 시야에 넣고 싶었다.

130㎞를 달려 大호남평야 종주를 마치고 정읍역에 도착. KTX는 이틀 온 길을 20여분만에 주파해버렸다.

익산 배산 연주정(聯珠亭)의 장관

아직 이른 시간인 오후 4시쯤 시내 모텔에 여장을 풀고 앞서 눈여겨보았던 전망대로 향했다. 배산은 해발 79m의 작은 언덕이지만 여기 광활한 들판지대에서는 어엿한 산 대접을 받는다. 정상의 연주정(聯珠亭)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동안 지나온 북쪽의 광야와 내일 가야할 남쪽의 광야가 아득한 소실점과 지평선으로 광막하다. 서쪽으로는 만경강 하구 너머 새만금방조제 안쪽의 바다(호수라고 해야 하나)까지 보인다. 뉘엿한 햇살에 물든 벌판은 색바랜 황금빛을 발했다.

다음날 드디어 김제로 들어선다. 여기 大호남평야에서도 핵심은 아무래도 김제다. 들판은 더욱 넓어지고 들판 가운데 띄엄띄엄 있던 낮은 구릉지도 잦아든다. 이제 지명도 온통 넓고 평탄하다는 뜻이다. 대야(大野), 만경(萬頃, 경은 약 3000평), 광활 등등. 전국 어디서도 보기 힘든 지명과 그 지명처럼 펼쳐진 광야에서 나는 몸과 마음이 광야처럼 텅 비어가는 것을, 완전한 공백으로 리셋되는 느낌을 받았다.

지도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워낙 들이 넓어 작은 언덕이라도 있으면 모조리 묘지 차지다. 김제 진봉면 가실리의 진주 강씨(晉州 姜氏) 묘역에 올라 인적 없는 광야를 마주한 나는 한동안 망연했다. 이제 슬슬 이 광야가 질리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단순한 풍경뿐인 광야에서 권태는 생각보다 빨리 불쑥 찾아든다.

김제 죽산에서 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 땅이 이렇게 넓은데 그 한가운데 자리한 큰 마을인 죽산은 여느 농촌과 다름없이 퇴락했다. 거리의 풍경은 70~80년대 분위기이고, 젊은이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저 넓은 벌은 누구를 먹여 살리고 있나.

이제 곧 동진강이다. 예전에 여러 번 다닌 길이다. 동진강 둑길을 따라 계속 상류로 가면 정읍이니 마음이 편하다. 마침 본지에 ‘한국의 강둑길’을 연재하는 조용연 작가도 황금벌판을 찾아 이번호에 동진강을 다루었다. 서로 중복되는 부분이 있어 이 글을 다음으로 미룰까 하다가 광야의 감흥을 잊을 수 없어 간략히 싣는다.

생각보다 진행이 빨라 정읍역에는 3시쯤 도착했고 서울행 3시58분발 KTX에 여유롭게 올랐다. 이틀간의 주행거리는 130㎞, 광야의 광기(廣氣)에 흠뻑 젖은 몸과 마음은 작은 계단에도 허둥댄다. 이틀이나 걸려 온 길을 KTX는 20여분 만에 허망하게 지나쳐 버렸다.

글·사진 김병훈(자전거생활 발행인)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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