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릉천·문산천 (고양·양주·파주)
잃었던 공릉천의 이름을 되찾았다고는 해도 여기 저기 곡릉천의 흔적은 여전하다. 장강대하(長江大河)의 용틀임은 그렇다 쳐도 크지 않은 이 강이 똬리를 틀고 가는 건 북한산의 장엄한 기개가 흘러 내린 여분 덕일 게다. 곡릉(曲陵)이라 할만하다. 송추, 장흥, 일영역의 이름은 청춘의 간이역이다. 70년대를 최루 연기 속에 보낸 학생들의 낭만은 소박했다. 교외선열차를 타고 와야 만나는 그 은밀한 골짜기에서 청춘은 포크송과 모닥불 속에 타올랐다. 공릉천과 문산천의 시·종점이 모두 철조망이듯 세월이 가도 분단은 공고하고, 긴장은 조수처럼 들고 나는 일상일 뿐이다
아직 떠나지 못한 미명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한강하구를 부여잡고 있다. 불안한 앞날을 닮은 색깔이다 남북이 간신히 합의한 긴장대치의 일단 멈춤에서 온 고요다.
송촌교는 한강의 제1지류하천인 공릉천의 종점이다. 오늘 하루 이 강의 아랫도리에서 거슬러 올라가는 수고를 피해 갈 수 없다. 공릉천 발원지 너머 산맥을 올라서서 문산천까지 돌아 다시 한강 줄기로 와야 하기 때문이다. 대북확성기방송이 심장을 울리던 파장은 이제 추억속의 음향이다. 한 번도 맑아 본적 없는 갯물이 송촌교 아래를 거슬러 올라갔다 빠진 궤적이 움푹 팬 갯고랑이다. 적의 수중침투를 차단하기 위한 쇠갈고리는 촘촘해서 바람이나 물이 아니면 그 어느 것도 자유롭지 못하다.
긴장의 여진이 남은 자유로
영천배수갑문까지 3㎞ 남짓한 길은 일부러 포장을 사양했다. 철새를 비롯한 동식물보호구역으로 남겨놓기 위해서다. 불편을 사랑하면서 아침을 달려가는 자전거들도 명상의 느린 발걸음에 익숙해진다.
남쪽으로는 심학산(194m)이다. 높지 않아 강자락까지 밀고 나온 신도시의 스카이라인에 가려 있지만 명산이다. 거북이 등을 닮은 자태라서 구봉산(龜峰山)이라고도 한 야산, 궁궐에서 키우던 학이 날아든 산이라 심학산(尋鶴山)이라 개명했다. 동양학자 조용헌이 <휴휴명당>에서, 동네 사람들이 날마다 올라 다니는 뒷동산을 명산으로 꼽은 이유는 송구봉이란 조선조 숨은 거유(巨儒)도 한 몫 한다. ‘서인(西人)의 장자방(張子房)’이요, ‘노론(老論) 독재 300년의 숨은 왕’이란 평가를 받는 그가 이름마저 구봉으로 개명했다는 명산이다.
가난한 마포 신수동 출판시대를 마감하면서 파주출판문화단지는 제대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알고 잡았는지 모르고 잡았는지 배산(背山)이 심학산이요, 임수(臨水)가 한강이니 이보다 더한 명당이 있을 수 없다. 불가에서 말하는 한 생각의 시작이 화두에 있고, 그 생각의 구체적 표현이 글이라 한다면 이를 널리 펴낼 출판의 본산이 명산 아래 강마을이라니 그렇지 아니한가.
벌판이 넓다. 최창조 교수는 <한국의 풍수지리>에서 일찍이 파주 교하의 이 넓은 벌을 통일한국의 수도로 최적지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했다. 교하의 너른 벌 건너편엔 김포벌판이 마주하고 있고, 한강과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황해도에서 뻗어 나온 북의 관산반도가 부드럽게 물을 감싸고 있어 국도(國都)로서 손색이 없다는 바로 그 땅이다.
통일의 길은 멀고, 이 넓은 벌에 운정 신도시가 들어서 번호를 붙여가며 한강 가까이로 몸피를 불려가고 있다. 3지구까지 30만에 육박하는, 전형적인 베드타운이다. 미분양의 늪을 간신히 탈출하는가 싶긴 하지만 운정지구는 다른 곳의 뜀박질만은 못하다. 돈 때문에 서울에서 밀려나와서도 서울에 목매달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출퇴근은 난리에 가깝다. 강남 삼성에서 일산 킨텍스까지 추진 중인 GTX 노선을 운정까지 이어 붙이려는 파주의 필사적인 노력도 돈(국가재정) 앞에 가로막힌다. 하지만 GTX든 KTX든 결국 파주까지 이어 붙을 것이다. 돈 때문에 밀려난 사람들의 분노도 당당한 한 표의 힘을 갖고 있으니까.
영천배수갑문을 지나면 둔치로 난 자전거길로 내려선다. 말라가는 물은 모래톱을 지날 때 풀이 죽어 흐른다. 둠벙을 닮은 물구비를 지날 때면 물때가 낀 강은 녹색의 팩을 붙인 듯 어둡다.
덧없는 인간사, 왕조의 그늘 삼릉
봉일천을 지나면 삼릉 입구다. 조선조 예종의 원비(妃) 장순왕후의 공릉(恭陵),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 한씨의 순능(順陵), 영조의 큰아들인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비의 영릉(永陵)이 골짜기에 숨어 있다. 삼릉을 비운의 능이라 부르는 건 세자빈의 신분으로 아들(인성대군)을 낳다 승하한 장순왕후와 왕비 된 지 5년 만에 열아홉 나이로 승하한 공혜왕후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놀랍게도 두 왕비는 자매간이다. 궁지기에서 13년 만에 영의정까지 오른 조선조 최고의 경세지략가 한명회의 두 딸이다. 친정의 족보는 자매지만 시댁의 족보는 숙모와 조카며느리다. 얼마나 대단한 힘이었으면 두 딸을 왕비로 만들었을까. 그러나 꽃다운 나이에 구중궁궐에서 죽어간 딸들과는 달리 아비는 73세까지 살아, 그즈음으로는 천수를 누렸다. 하지만 그도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 복위 건이 도화선이 된 갑자사화(甲子士禍)의 칼날 앞에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면치 못했으니 참 기구한 인생사다.
강물이 보에 막힐수록 늘어난 수량만큼 걸음도 느려진다. 느슨한 보폭 사이에 낀 녹조는 환경론자들이 말하는 하천관리의 중요 공격 포인트다. “가물어서 그렇다. 올해는 마른장마였다.”는 말은 변명처럼 들린다. “하천정비 공사를 부실하게 해서 그렇다”는 말이 전반적으로 힘을 얻고 있는 목소리다. 언제 녹조가 사라질지는 알 수 없다.
지영교를 지나면 공릉천은 지방하천의 호적에 들어간다. 강을 건너오는 적의 탱크를 저지하기 위한 장애물 근방에서 군데군데 제방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용치(龍齒) 치료도 함께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1.9m 간격으로 박혀 차량통행도 저지하던 것을 3m 간격으로 이설하는 작업이니 용잇빨 임플란트 작업인 셈이다.
1번국도 ‘통일로’, 대박로인가
필리핀참전기념비가 서 있다. 자전거길도 끝난다. 1번국도가 이미 벼랑을 차지하고 있으니 자전거는 문간방 신세다. 최영 장군의 묘지가 대자리 깊은 골짜기에 있다. 70년대에 미제 군복을 물들여 입고 대학을 다니던 내게 대자리까지 오는 버스는 회수권 한 장에 추가요금을 내면 올 수 있는 유일한 데이트 코스였다. 버스 뒷자리의 소음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시절 남북의 분단은 두 번째 과제였다. 군사독재의 시간은 강고해서 대학가 위수령(衛戍令)과 탱크는 당연한 줄 알았다. 대학 진학부터 경찰을 직업으로 정조준한 순간, 민주의 이념은 사치였고, 나는 시위를 외면했다. “세월이 가다보니 그 하늘이 그 하늘같았다.”는 서정주의 시인다운 친일 독백이 그런 심정이었을까.
번호 1번의 국도, 선조대왕의 참담한 몽진길,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며 이름 붙인 길. ‘통일로‘는 ‘7·4 남북공동성명’의 깃발을 단 남북의 검은 세단이 오가던 시간을 겪어내며 늙어갔다. 자유로가 한강과 임진강을 따라 광폭의 여백까지 거느리고 확장되어 가는 만큼 통일로는 비좁고 남루해져갔다. 특급열차이던 통일호는 보통열차 비둘기와 함께 사라졌다. 새마을이 우선이었고, 무궁화는 고급열차에서 3등열차로 주저앉았다. 은하수 담배의 연기처럼 통일호의 기적도 사라져 버린 게다. 이제 통일의 이름이 ‘대박통일’ 앞에서 힘을 얻는듯하다. 흥부의 꿈은 역시 대박의 기적이거늘.
서울의 화장터 벽제, 그리고 승화원
통일로 교차로가 벽제역 곁을 지난다. 엷어졌다고는 해도 벽제의 이미지는 화장장(火葬場)이다. 승화원으로 이름을 고치고, 추모공원을 아무리 세련되게 꾸며도 화장터 언덕은 오래된 기억이다. 북망산천 가는 길이라고 북한산 너머 벽제로 정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서울사람들이 죽어서 한 줌 재로 돌아가는 엄숙한 공간이다. 서울로 단봇짐을 싼 이뿐이도 금순이도, 돌담길 돌아가며 또 돌아보고 서울로 간 사람도 죽어서는 그래도 고향땅을 밟았다. 그 형편도 못되는 사람들은 공동묘지에 묻히거나 한줌의 재로 한강에 뿌려졌다. 화장(火葬)이 불경스러운 시대를 지나온 그림자다. “서울사람 뒤처리를 고양시가 하란 말이냐”고 목청 돋우는 오늘날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다.
벽제를 지나며 공릉천은 큰 강 상류에서나 볼 수 있는 용틀임을 수도 없이 하며 깊어간다. 원래 공릉천(恭陵川)이던 강은 일제치하에 곡릉천(曲陵川)으로 바뀌었다. 민족정기의 말살이란 배경이 깔려있던 강이 제 이름을 되찾은 것은 2009년에 와서지만 여전히 곡릉천의 흔적은 지도 곳곳에 남아있다. 연유야 어쨌든 곡(曲)자를 붙일 만한 굴절의 강이다.
청춘의 간이역, 일영·장흥·송추
벽제를 돌아가면 일영유원지다. 도봉과 북한산의 맑은 물이 소리 내며 흐르다 고요해질만한 곳에 유원지가 들어섰다. 한 시절, 청춘남녀의 보트놀이 명소도 있었다. 정신없이 달려가는 서울외곽순환고속국도에서 보일 리 없다. 이제 교외선 열차마저 멎어버리고 말았으니 일영은 아는 사람들이나 찾아가는 골짜기가 되고 말았다.
백마역과 애니골의 통기타를 기억하는 모닥불 세대에게 일영과 장흥은 교외선 열차의 또 다른 행선지였다. 월남 갔던 삼촌이 가져온 야전(야외전축)에 LP레코드판을 돌리며 고고춤을 추던 열차는 낭만의 이동무대였다. 이제 간헐적으로 고양이나 양주 국군병원의 환자수송을 위한 열차가 지나갈 뿐 녹슬어가는 철길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양주사람들의 소망은 지역 언론에서나 뜨겁지 아직 정해진 게 없다. 복선전철을 깔자는 이도 있고, 기존철로를 이용해 도시형 트램을 설치하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꼬드기는 제안도 있지만 요지부동이다. 서울역에서 출발해 능곡, 송추, 의정부를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던 ‘서울야경열차’의 추억을 다시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장흥역도 그렇게 쇠락해 갔다. 도시의 욕망이 교외로 삐져나올수록 사람들이 쉬었다가는 풍경이 내밀해져 갔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산자락에 들어서던 모텔의 은밀한 분산은 도시 한가운데서 스크럼을 짜고 들어선 모텔 집성촌의 불야성 앞에 힘을 잃어버렸다. 장흥의 퇴락을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도시재생을 위해 팔을 걷어 부친 것이 ‘장흥 오라이’ 계획이다. ‘아직은 살아있다. 괜찮다’는 뜻의 ‘오라이’(All right!)다. 낡은 모텔이 레지던스로 바뀌고, 장흥역 앞엔 ‘역전다방’ ‘도깨비꽁방’ ‘장수사진관’ 등 주민친화의 공간이 새로 간판을 걸었다. ‘장흥대박협동조합’의 이름을 내건 토박이들이 교외선열차 시대의 부활을 시동 걸고 있다.
자전거길은 강둑을 따라가다가 자맥질하듯 강바닥으로 내려앉기도 하며 ‘국가자전거길’이라는 이름을 당당히 내걸며 간다. 자전거길도 국가의 길이라니 가상도 하다.
송추계곡 입구에서 자전거는 말머리고개를 향해 39번 국지도(國支道)로 접어든다. 공릉천의 최장발원지인 사패산 북사면 송추골짜기와는 헤어진다.
2001년, 사패산터널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만들면서 마지막 남은 난공사였다. 터널공사보다 더 큰 난관은 불교환경단체까지 가세한 승려 보성의 망루 위 투쟁이었다. 천성산 터널과 도롱뇽 멸종론, 지율 단식의 복사판이었다. 2년여의 공사 중단은 5800억 원의 피해를 남겼다. 터널은 편도 4차선 세계 최장광폭터널로 기네스북에 올랐고, 고급스포츠카들의 놀이터로 변했다.
“후회스럽다. 대안 없고 행동 없는 환경운동은 실패한다.”고 고백한 보성스님은 오히려 여느 비관적 환경론자보다 솔직했다.
꾀꼬리봉, 앵무봉, 개명산, 계명산 그 혼돈
모텔의 사열을 받으면서 헐떡거리며 오른 말머리고개는 제대로 된 양주 땅과 도봉·북한산의 뒷덜미를 구별 짓는다. 꾀꼬리봉, 앵무봉, 개명산, 계명산, 고령산, 이 5개의 이름은 지도마다 제 각각인 같은 산의 다른 이름이다. 꾀꼬리봉은 말머리재 양쪽에 다 있으니 꾀꼬리가 이 산 저 산을 날아 다녔다는 것인지 도시 종잡을 수가 없다. 법원이 판결을 내려야 이름이 제대로 정해지려나.
기산저수지를 지나 마장저수지까지는 줄곧 내리막길이다. 꾀꼬리봉에서 출발한 문산천은 꾀꼬리 소리만큼이나 물이 맑다. 영장교에서 목소리를 낮춘 강물은 박달산휴양림 앞을 지나가면서는 아기자기한 강둑을 선사한다. 그것도 잠시다. 367번 지방도를 달리다 협동창만교를 지나면 비암천이 합류한다. 거기 유명한 ‘벽초지문화수목원’이 있다. 한국의 미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아기자기하게 배치하고 있다. 여왕의 정원과 유럽스타일의 조각공원은 자연에 목마른 수도권 사람들을 4계절 불러 모은다.
LG 디스플레이 발 파주의 천지개벽
만장교에서 1번 국도와 만나는 월농교까지는 포장도로를 따라가는 한가한 강둑길이다. 파주역에서 건너오는 옥석교 언저리는 제방공사를 위해 세워둔 측량 말뚝이 늘어서 있다. 파주의 운명은 물에 따라 결정되어왔다. 1965년 물난리에는 교하와 임월 들판 모두가 잠겼었다. 문산천 둑이 터진 1996년 홍수 때는 ‘강인지 들판인지 구별할 수 없는 황색의 바다’였다고 신문은 전했다. 문산읍사무소를 비롯해 저지대가 전부 잠겼었으니 이 길지 않은 문산천을 국가하천으로 관리하는 큰 이유다.
옥석교 서쪽으로 거대한 성채의 일부가 드러난다. LG디스플레이가 들어선 산업단지다. 강이 재물이라 하니 파주의 운명은 강물이 교차하는 교하(交河)에서 결판나리라. 자유로의 편리한 교통과 가까운 인천공항, 인천항이 물류를 보장한다. 이 거대한 공장을 붙잡아 앉힘으로써 파주는 통일시대를 한걸음 더 다가서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산업의 위대한 파노라마 앞에 문득 이명처럼 들리는 말은 씁쓸하다. “내 딸이 그 회사에 지원했으니 살펴만 봐 달라.”고 말했다는 국회의원의 말은 청탁 여부를 논하기 전에 이 벌판에서 공허하다. 경제를 따라가지 못하는 정치도 문산천을 드나드는 조수처럼 밀고 썰리기를 반복할지도 모르겠다.
자유로가 빤히 보이는 초입 임월교(臨月橋)에서 정지신호다. 보름밤 갯고랑에 번쩍이는 달빛이나 바라본다 한들 허허로울 일만 남았다. ‘더 이상 강둑길은 있어도 없는 길이다.’
<참고자료>
1. <한국의 풍수지리> 최창조, 민음사,1995
2. <교외선의 부활> 이연섭 , 경기일보
3. <낱말의 습격> 이상국, 아시아경제
4. <휴휴명당> 파주 심학산 , 조용헌, 불광, 2015
5. 보성스님 인터뷰, 동아일보 초대석, 2005
6. 도시재생, ‘장흥오라이’의 새로운 이야기, 2015
<협찬>
팬텀 26XC (전기자전거)- 삼천리자전거
<강둑길에서 만난 사람>
김정일(77)
공릉천을 따라가다 금릉역 다리 밑에서 만난 노익장이다. 이야기 보따리가 끝도 없다. 양양 인구리 동창여관집 아들인 그는 6·25 동란 직후의 혼란하던 시절 동생 앞으로 나온 영장으로 대신 입대하였다. 말뚝 박는 줄도 모르고 장기하사가 되어 35년간 군 생활을 한, 그야말로 우리시대의 선임하사님(상사 제대)이다. 타자를 잘 쳐서 월남파병도 다녀오고, 중사 시절 부대 인근에 유원지를 만들려는 서울 사람들에게 반대하다 반정부시책인물로 지목받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기까지 할 정도로 꼬장꼬장 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말이 아니면 하지마라.’가 내 평생의 신조지.” 사위가 사준 자전거를 타고 매일 강둑길을 다니면서도 그저 나라걱정뿐인 평생군인이다.
박생일(64)
문산천을 타고 가다 광탄면 근처 강둑에서 만난 조선족 동포다. 땡볕에 강둑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기에 말을 걸었다. 고향생각을 하며 낚시를 하는데 버들치 몇 마리밖에 못 잡았다고 보여준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에서 임업국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하고 한국에 왔다. “작년에 한국에 놀러왔었는데 올해는 아주 일하러 왔지요. 자원재생공장에서 일하는데 사장님과 공장장이 아주 좋은 분들이에요.” 그는 동포들이 받는 F-4비자를 받아 2년에 한번은 중국에 갔다 와야 한단다. 우리 돈 50만원 정도의 연금도 받으니 중국에서 생활은 걱정 없는데 아직 일을 할 수 있어 좋단다. “선대에 전라남도 강진이 고향이라는데 아직 한번 가보지도 못했어요. 어떤 친척이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중국 청도에 아내와 출가한 딸이 있는데 늘 보고 싶다며 검게 그을린 얼굴에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여행 만들기>
공릉천과 문산천을 달리자면 경의선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더구나 중앙선까지 직통으로 연결하고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경의선 금릉역에서 하차, 송촌대교까지 가면 출발점이 된다. 송추 말머리고개만 좀 높을 뿐 거의 평지라 수월하다. 돌아오는 길은 문산역에서 전철을 타면 자전거전용 칸에서 제대로 된 코레일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헤이리나 벽초지수목원 또는 삼릉 등을 둘러볼 작정이면 하루로는 부족하다.
<교통편>
서울에서 접근하는 경우, 경의선 전철로 파주 금릉역과 문산역을 이용하면 된다.
05:30~23시 매 15~20분 간격으로 운행
중앙선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경의선은 자전거에게 가장 친절하다. 휴일은 자전거 전용칸이나 다름없다
<음식점>
광주식당(양주 일영)031-855-7625
공릉천 일영유원지에 있다. 온통 닭볶음탕과 보신탕 간판이 즐비하다. 광주식당은 된장찌개와 김치찌개가 메뉴에 들어있다. 찌개 맛은 평범하나 당귀, 민들레. 머위를 각기 장아찌로 내놓아 새콤달콤한 맛이 새롭다. 7000원
약선마을(파주 광탄) 031-948-3256
문산천을 여행하다보면 광탄면 방축4거리에 있는 음식점이다. 고기류에 해물까지 다양하다. 강원도 필례약수로 지은 밥과 강원도식 반찬이 눈에 띈다. 특히 강원도에서 토종된장을 진하게 끓인 뽁작장에 가까운 된장찌개는 아는 사람들에게는 입맛나게 하는 음식이다. 점심시간을 약간 피해서 가면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다. 약수돌솥생선구이 1만2000원, 돌솥더덕구이 1만원, 흑돼지두루치기 1만원
풍경에 건네는 말(43) by 조용연
트럭위의 밥상
아부지 백리안쪽 떠돌던 장터걸에
난전이 선자리를 허리졸라 가는중천
곱삶이 푸성귀함께 양을불려 비빈다
헌지붕 터진하늘 낙수지는 처마밑에
눈물반 빗물섞어 들다마는 찬밥한술
허기를 동무하다만 내새끼들 울던뺨
해봐야 평반평상 우리식솔 한묶음이
저릿한 다리펴고 올라앉은 허리누각
가뭇한 된설움긁어 고봉만든 이 밥상
*곱삶이 : 보리쌀로만 지은 밥, 두 번 삶아 지은 밥 .고봉 : 수북하게 담은 밥
글·사진 조용연(여행작가, 前 울산지방경찰청장)
·1954년 경북 문경 출생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졸업
·경기 여주경찰서장, 서울 동부경찰서장(현 광진경찰서)
·경찰청 기획과장, 주중국대사관 참사관(북경)
·서울청 교통지도부장, 경찰청 경무기획국장
·충남지방경찰청장, 울산지방경찰청장
·현 에스원 감사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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