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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강둑길 | 낙동강 최상류 (태백·봉화·안동)] 백두대간 심장에서 솟은 강, 청량산을 안고 돈다

바이크조선 | 2015.10.14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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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최상류 (태백·봉화·안동)

황지는 여느 강의 시원과는 다르다. 옹달샘 조롱박으로 퍼낼 수 있는 물이 아니다. 백두대간의 심장 태백에서 수 억만 년을 잠자는 검은 진주 석탄을 어루만지며 솟아난 물이다. 태백·봉화 깊고 깊은 골짜기에서 낙동강이란 이름은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뼈마디 부딪힐 때마다 비명을 지르던 강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승부, 분천을 지나간다. 고운(최치원)과 퇴계(이황)의 사유와 문향이 깃든 봉화 청량산 언저리를 돌고 나서야 안동 선비들의 발걸음처럼 낙동강다워진다.

멀리 청량산을 두고 흘러가는 낙동강, 고운도 퇴계도 이 골짜기로 청산에 들었으리라

서울에서 서둘러 출발했는데도 태백에 도착하니 해가 중천이다. 태백역 앞 택시들도 손님을 기다리다 지쳐 있다. 눈꽃열차가 들어오는 계절도 아니고, 본격적인 여름휴가철도 좀 이른듯하니 어중간하다. 제천·영월을 지나 두문동재를 넘어 태백에 들어오면 깊은 산중에 사로잡힌 느낌이 든다. 황지가 낙동강의 시발이라는 것은 국민상식에 속한다.

낙동강 1300리, 황지에서 출발하다

호남의 젖줄이 영산강이라면 영남은 낙동강이 그에 해당한다. 보통 샘이 용천하는 산 8~9부 능선이 긴 강의 발원지인 것이 일반적이나 황지는 태백 시내 한가운데 있다. 시내 한 가운데에 황지가 갑자기 생긴 게 아니니 도시가 황지를 중심으로 생겨 난 게 맞다. 예전에는 태백이라는 말은 산 이름에나 붙어 있었다. 황지, 장성, 철암, 도계는 동네에 붙인 이름이다. 그저 태백산 자락 골짜기마다 오불조불 붙어사는, 석탄과 함께 살아가던 마을일뿐이었다.

낙동강 1300리의 시작, 태백 황지 연못은 이제 시내 한가운데가 되었다(태백 황지동)

개가 지전(종이돈)을 물고 다녔다는 흥청거리던 시절도 석유시대의 도래와 함께 막을 내렸다. 탄광의 막장은 막막함과 더 갈 데 없는 삶의 절망의 벽으로 묘사되었다. 이제 검은 도랑물은 맑아졌고, 다닥다닥 일자 지붕을 한 탄광관사는 낡을 대로 낡아 버렸다.

황지 연못에 비친 주변의 겨울풍경(조용연 자료사진, 1995)

‘낙동강 1300리 시발’이라는 표지석이 아니라면 그저 인공연못이 있는 도심 소공원 같은 풍경에서 출발한다. 7월 더위는 이 고원 도시도 예외가 아니어서 구시가 큰길에는 청소차가 뿌린 물이 거의 말라가고 있는 중이다. 태백에서 승부로 가는 길은 내리막이다. 낙동강 중하류의 기울기가 1/100,000인데 황지천(낙동강의 제1지류하천)의 기울기는 17/10,000 정도니 자전거 페달에 얹은 발은 편안하기 그지없다. 단숨에 태백 골짜기를 벗어나는 분기점인 구문소에 이른다.

산을 뚫은 물의 힘을 보여주는 고생대지형, 구문소(태백 장성동)

산을 뚫은 낙동강, 구문소

구문소는 보통 지형이 아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고 말한 < 산경표>의 대원칙은 여기서 무너진다. 구문소란 이름이 그 해답이다. ‘구무’는 구멍·굴의 고어다. 지금도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방의 사투리에는 구무라는 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 어머니도 “구무가 맥힛다”고 하셨으니까. 억겁의 세월이 거대한 석회암 바위산을 뚫고 또 뚫어 드디어 만든 것이 이 구문소의 구멍이다. 유식한 선비들이 구문소(求門沼)라 이름 붙였으니 과히 틀린 표현도 아니다.

협곡열차에서 본 낙동강 최상류, 여울과 철길이 잘 어울린다(봉화 석포)

동점동 방향으로 180도를 돌아가던 물길이 막혀 밭이 되고, 문(門)을 구(求)하던 물은 산을 뚫어 소원을 풀었다. <세종실록지리지><대동여지도>같은 고문헌도 구멍 뚫린 하천이라고 하여 ‘천천(穿川)‘이라 적었고, 이곳 사람들은 ’뚜루내‘라 불러왔다. 구문소가 천연기념물 제417호로 지정된 것은 고생대 한반도 지형의 비밀이 담겨 있는 자연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삼엽충의 화석이 흔하고, 오래 전 적도근방에 있던 한반도가 어떻게 오늘날 북위 38도 근방까지 흘러오게 되었는지는 옆에 세워진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에서 설명해 준다. 지질학의 타임머신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반나절이 훌쩍 가버릴 것이다.

눈꽃열차로 유명해진 승부역. 5분간 정차는 사진 찍으라는 시간이다(봉화 승부)

하늘 세 평 땅 세 평, 승부에선 기차 타고

승부역으로 가는 이유는 철암에서 출발해 분천으로 가는 협곡열차를 타기 위해서다. 석포를 지나 승부역까지 40리길은 더욱 깊은 계곡 낙동강과 함께 간다. 승부역은 자전거가 갈 길을 허락하지 않는다. 협곡열차나 영동선 무궁화호 신세를 져야 이 계곡을 빠져나갈 수 있다. 하는 수없이 철암으로 올라간다. 협곡열차를 타기 위해서다. 그나마 하루 두 번(주말에는 세 번) 있는 협곡열차가 아니었더라면 철암은 그야말로 괴괴한 한낮의 정적에 휩싸여 있을 마을이다.

8월의 뙤약볕 아래, 산타할아버지와 눈썰매도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다 지쳤다(봉화 분천)

온 천지가 하얀 눈꽃세상도 백미지만 짙푸른 녹음과 어지럽게 연둣빛이 흔들리는 계곡물을 느린 걸음으로 훑어가는 기차는 또 다른 맛이다. 계절이란 묘해서 객차 한 가운데 그대로 설치되어 있는 스토브의 따뜻한 열기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접이식자전거의 위력은 힘자라는 데까지만 타고, 접어 버스나 기차에 오를 때 드러난다.

평상에 누워 쉴 수 있는 여유, ‘시가 있는 분천역 맞이방’(봉화 분천)

기차가 석포역을 지난다. 황산과 아연화물이 큰 손님인 역이다. 연화광산과 석포제련소는 한 짝이었다. 1935년 일본인이 발견한 연화광산은 납, 아연, 은, 티타늄을 70년대까지도 원광 그대로 수출했다. 석포제련소가 들어서면서 납과 아연의 국산화자급자족은 이루어졌으나 낙동강 최상류는 중금속오염에 시달렸다. 2015년 현재, 석포제련소의 토양정화명령은 진행 중이고, 공장증설을 반대하는 환경단체의 플래카드는 낯선 간이역 꽃밭에서 펄럭거린다. 협곡열차(V트레인)와 순환열차(O트레인)가 이 깊숙한 백두의 심장으로 관광객을 불러 모을수록 석포는 분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SF 소설에나 나올법한 은회색 탈황시설과 거대한 공장은 환경과 산업의 역학관계를 기하학적으로.

낙동강도 물이 불어 그나마 래프팅을 재개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봉화 명호)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비경의 골짜기다. 1가구밖에 살지 않는 암기동, 당산과 당집이 있는 마무이, 승부분교가 있던 학교말과 결둔말을 다해도 38가구가 이 골짜기에 사는 사람  전부다.

승부역에서 5분 정차는 순전히 사진 찍기 용도다. ‘하늘도 세 평, 땅도 세 평’이란 두 줄은 승부역이 말하는 이 간이역의 시어다. 사람의 힘은 대단하다. 도로를 따라 가면 무려 50㎞를 돌아서 가야 분천역을 만난다. 길 없는 벼랑에 길을 만들어 승부역비경길이라 했고, 아주 오래 전 분천장으로 가던 배바위재 고갯길의 흔적을 낙동정맥트레일에 넣어 부활시켰다. 자전거로는 어느 쪽도 이른바 ‘끌바’(끌고가기)와 ‘멜바’(메고가기)가 아니면 허락되지 않는다. 다음에는 꼭 낙동강가로 난 좁은 길을 자전거를 끌고서라도 시오 리길을 다시 가리라.

현동, 임기를 지난 낙동강변은 길손의 독차지다(봉화 임기)

양원역도 순전히 관광객들을 위해 10분 정차하는 역이다. 기차가 수 십 년을 지나다녀도 기적소리를 듣고 시간을 짐작하던 것 외에는 혜택을 받지 못하던 주민들이 기차역사도 만들었다. 순수한 의미의 최초 민자역사인 셈이다. 막걸리 잔술과 부침 몇 종류가 입맛 다실 거리일 뿐 산나물 같은 특산물 몇 가지가 멀찌감치 서서 관광객들을 바라다보고 있다.

비동역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단출한 간이역이다. 승강장 높이만 열차계단에 맞추어 놓았을 뿐 대합실 하나 없다. 순전히 강변길을 걷거나 낙동정맥트레일로 올라붙는 걷기손님들을 위해 잠시 서는 역이다. 본분을 떠올린 자전거는 비동역에서 내린다. 십리도 채 못 되는 분천역까지는 소나무의 열병이 기다린다.

낙동강변의 산촌마을. ‘정보화마을’이란 용어는 짐작은 가지만 ‘노래연습장’ 만큼이나 관청이 만들어낸, 왠지 이상한 용어다(봉화 명호)

오랜 잠에서 깬 산간 마을, 분천

푹푹 찌는 한 여름, 분천역에는 산타할아버지와 눈썰매가 맞이한다. 이 골짜기가 외지 손님을 불러 모으기에는 한 겨울 순백 눈 세상이 효과적이라는 걸 말해준다. 애써 스위스의 알프스 고산역 체르마트와 협약을 맺고, ‘체르마트길’이라고 트레킹코스를 이름붙인 것부터 그렇다. 주황색 몸체를 흰색과 검정 무늬로 칠하고 백호열차라고 이름붙인 기관차는 어쩐지 동물원의 호랑이 같다. 분천역의 역무원들은 하나같이 친절하고 이 골짜기로 온 손님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먼저 일러 준다.

당집도 시대에 따라 주택개량을 했다(봉화 북곡)

맞이방(대합실)은 널찍한 평상을 들여놓아 기차를 기다리다 지친 길손이 아예 드러누울 수 있도록 배려했다. 시가 있는 기차역을 만든 아이디어는 한 박자 느리게 가도 좋다는 길손들의 동의 덕분에 더욱 푸근하다. 하루 10명의 승객이 고작이던 분천역은 5000명까지도 북적거리게 되었다. 기차손님들이 늘어날수록 마을의 먹거리 장터는 객차만큼이나 길게 늘어섰다. 어설픈 영화촬영장의 세트처럼 소나무를 켜서 못을 박아 만든 음식점은 뜨내기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허술하다.

청량산도립공원 입구는 단정하다(봉화 북곡)

원래 음식점을 열었던 1세대는 늙어버려 중늙은이들에게 자리를 넘겨주었고, 서울서 내려와 찻집으로 돈을 번 처녀는 본격적으로 카페개업을 준비하고 있다고도 한다. 춘양목의 집산지로, 목상들이 쥐락펴락하던 분천이 오랜 겨울잠에서 깨어나 생기를 되찾았다. 적산가옥의 외관이 그대로 살아있는 ‘향수수퍼’ 옆에 새로 짓는 건물 한 채의 용도가 이 마을의 현주소일지도 모르겠다. 제9호 태풍 ‘찬홈’이 밀고 온다는 예보에 기가 죽어 무궁화호를 타고 영주로 빠져나온다. 다음 주에 다시 이 골짜기를 찾을 수밖에 없다.

봉화 재산 장터에 붙은 ‘84 LA 올림픽 선전포스터, 서향순이 금메달을, 김진호가 양궁 동메달을 땄다(조용연 자료사진, 1984)

일월산과 임기역의 추억

분천역은 오전 9시가 되어서도 선하품을 한다. 군데군데 벌여놓은 공사판도 꿈지럭 거리기 시작한다. 회고개 넘기는 몸 풀기 전 주행치고는 힘겹다. 분천3거리에서 곧은재 아래로 터널공사가 한창이다. 세월 가고 나면 이 고개 넘는 것도 추억의 한 조각이 될 것이다. 현동 못미처 합소3거리에서 강 따라 내려가는 길은 한가한 독채 전세다. 임기교까지는 잎담배 밭이 이어진다. 건조장 앞에 모여 담배조리를 하던 마을처녀 총각들의 로맨스도 이제는 흑백사진 속 ‘그때를 아십니까’일 뿐이다.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는 기차는 임기역을 지난다. 이제는 역무원 없는 간이역으로 격하된 꼬마역. 내 군대시절 임기역에는 TMO(군여행장병안내소)가 있었다. 일월산 공군사이트로 가는 군용물자 하역을 위해 파견관이 상주했다. 모두들 서울역, 부산역 등 도시로 파견 나가고 싶어 하던 시절, 이 산골역으로 파견을 자원한 내 뜻은 꿈에 그쳤다. 화물열차나 간간히 서, 사람이 귀했던 간이역에서 온종일 영어책과 씨름했다는 선임병의 자랑은 지금도 귀에 선연하다.

일제가 송진채취를 위해 소나무에 낸 생채기는 세월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다(조용연 자료사진, 1984)

청량산 육육봉 발치로 돌아가며

임기교를 지난 낙동강은 갈산3거리 못미처에서 깊은 골짜기 속으로 혼자 사라진다. 21번 국도와 933번 지방도로 과인3거리를 지나 명호교에서 다시 만난다. 재산면에 들어서면 수박밭이 지천이다. 수박껍질 위에 붙은 청량산 브랜드는 도회에 청정한 맛을 파는가 보다. 잔뜩 졸아든 강물도 명호에 다다르면 넓은 강폭과 적절한 여울을 만든다. 래프팅을 준비하는 젊은 구호가 들려온다. 몇 차례 빗줄기에 골짜기엔 물이 늘었나보다.

재산에서 청량산으로 들어오는 물티재 초입, 치마저고리를 입은 할머니들과 비포장길 한가한 풍경이 지금은 상상이 가질 않는다(조용연 자료사진, 1984)

내 청량산의 기억은 1986년 이른 봄에 정지되어 있다. 아직 소백 연봉엔 흰 눈이 덮여 있었다. 새벽에 내린 영주역에서 멀리 보이던 그 은빛 봉우리가 선명하다. 봉화를 지나 재산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찾은 청량산, 지금은 오마도터널이 있는 물티재를 걸어 산으로 들었다. 청량사로 올라가는 비스듬한 벼랑길은 몇 발짝을 옮길 때마다 또 다른 경치를 선물했다. 사실 청량산 육육봉의 진면목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청량사 맞은편 축융봉과 밀성대 쪽 풍광이 눈에 들어왔다.

안동엔 퇴계종택을 비롯한 고가들이 낙동강 물굽이마다 숨어 있다(안동 도산)

막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지만 공원관리시설은 없었다. 유일한 점방(가게)은 민박을 겸하고 있었다. 주인에게 당귀와 천마로 담근 술을 얻어 마시고는 군불을 뜨끈하게 땐 방에서 달게 잤던 기억만이 지금도 포근하다. 다음날 다시 재산으로 나오며 비포장인 물티재를 넘다가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남쪽 산 능선을 오르기 시작했다. 몇 그루의 소나무 표피에 파인 깊은 생채기와 거기 매달려 있던 녹슨 깡통을 발견했다. 손을 대자마자 비스킷처럼 부서졌다. 오래된 부적을 건드린 것처럼 괜스레 무서워 그냥 발길을 돌리고 말았지. 그 흔적이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의 마지막 발악과도 이어져있었다는 걸 안 건 한참 뒤였다. 송진을 채취하여 정제 테레빈유를 뽑아 항공유로 공출하기 위한 강제수탈의 증거였다. 표피의 반절 이상이 잘려나가고도 살아서 증언하듯 버티던 소나무들은 위안부할머니들의 삶을 닮았다. 더러는 설해목(雪害木)으로 쓰러져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더러는 죽지 못해 살고 있으리라.

안동호는 가뭄으로 저수량이 줄었어도 물주머니가 커 물놀이에는 지장이 없다(안동 도산)

물굽이 돌 때마다 안동선비의 자취가

청량산도립공원 입구를 지나면 낙동강은 다시 몇 번의 물돌이질을 한다. 원래 분강촌 부내마을에 있던 농암종택이 옮겨 앉은 도산면 가송리가 초입이다. 길은 더 이어지지 않는다. 35번 국도를 에둘러 퇴계종택에 이르면 이제 조선유림의 기품이 단아한 고풍 한옥에서 우러나온다. 안동에서 이름 있는 선비집안의 종택은 거의 낙동강의 물굽이 곁에 있다. 안동댐을 만들면서 더러는 늘어난 물 가까운 곳에 자리 잡았고, 더러는 멀리 옮겨 앉았다.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안동, 예안, 도산에 있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리라.

퇴계선생 묘소에서 고개를 넘으면 <이육사 문학관>이다. 한창 공사 중이어서, 강 건너 왕모산 칼선대 절벽에서 영감을 얻어 썼다는 시 ‘절정’의 한 구절도 연상하기 어렵다. 윷판대 산마루에 오르면 도산9곡 여섯 번째 물굽이 천사곡(川沙曲)과 일곱번째 단사곡(丹沙曲)이 내려다보인다. 이육사가 ‘광야’에서 차용한, 내달리는 산맥, 비로소 길을 연 큰 강물,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모두 낙동강변의 유장한 이미지 속에서 살아 나왔다.

안동댐에 이르면 조정지 댐의 풍광이 가슴 시원하게 펼쳐진다(안동 와룡)

멀리 청량산이 보이는 ‘예던길전망대’까지가 도산서원에서 들어가는 강변길의 종점이다. 신라의 고운 최치원과 문장가 김생만이 청량산을 사랑한 게 아니다. 후세의 퇴계 또한 청량산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우리집 산(吾家山)’이라 하고, 스스로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 칭했다. 산에 가는 게 아니라 너무나 소중한 나머지 ‘청량산에 든다’면서 이런 시조를 남겼다.

청량산 육육봉은 아나니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훤사하랴 못 믿을 손 도화로다
도화야 떠나지마라 어주자(어부) 알까 하노라
(‘청량산가’ 중)

안동댐은 낙동강자전거길의 시점이자 종점이다(안동 성곡동)

도산서원은 강 건너가 널찍하게 트인 언덕 절경에 자리하고 있다. 자전거 타고 휘이익 지나가며 점찍고 말 풍광이 아니다. 강물이 갈라지며 사람이 모여 살던 의인부락 앞 섬마(섬마을)는 섬 채로 물속에 가라앉아버리고, 협곡열차로 되살아난 분천역(汾川驛)과는 달리, 분천리(汾川里)란 이름만 남았다. 가뭄에 지친 안동호의 연흔(漣痕)이 켜켜이 들고 일어나 함께 달린다. 수몰의 정적 속에 잠자던 안동 선비들의 역사가 기지개를 켜는 듯하다. 낙동강은 거대한 안동호에서 제자리걸음이고, 나소리 주계리를 지나면 롤러코스터를 닮은 삼십 리 호반길이 지친 자전거 길손을 신나게 맞아 준다.

<여행 만들기>

태백에서 안동으로 가는 자전거는 우선 승부역에서 가로막힌다. 무궁화호 열차든 협곡열차든 기차의 신세를 지는 게 좋다. 접이식 자전거면 문제없으나 보통 자전거라면 성수기만 피하면 눈 감아 주기도 한다. 물론 끌고 갈 각오를 하고 강변 트레킹로를 따라가는 것도 추억이 될 것이다. 거리상은 가능하나 당일치기 보다는 청량산도립공원에서 1박을 하면 넉넉하게 청량산 구경까지 할 수 있다. 안동에서는 중앙선 기차나 고속버스가 있어 상경이 쉽다.

<강둑길에서 ‘못’ 만난 사람>

김병한(61)

분천역 앞에 태어나 고향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다. 춘양, 임기, 현동의 목상들과 산판의 역사를 직접 경험하며 살아온 마지막 세대다. 가난해서 배우지 못해 고향을 지키게 된 것이라고 자조하듯 말한다. “산판일 하며 안 해본 게 없지요. 이제 몸이 고장 나 버렸어. 관절이 아파 병원신세를 자주 지고 말이요.” “분천이 그땐 흥청거렸지. 5일장도 서고, 승부, 양원 사람들도 기차 타고 장보러 오고…. 저기에 ‘평양집’이라고 있었는데 거기가 기생집 중에는 제일 컸어요. 목상들 돈이 흘러 댕겼거든.”

박상돈(78)

명호면 북곡리 청량산 서쪽 자락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원래 황해도 연백사람인데 인천에서 살다 어찌어찌 부처님 인연으로 청량산 아래까지 흘러왔단다. 말솜씨가 예사가 아니라 채근하니 때론 절에서 신도들 앞에서 법문도 한다는 처사님이다. 스님들의 욕심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나야말로 무소유를 실천하고 살고 있지. 내 건 방 한 칸, 땅 한 뙈기 없어도 난 걱정 안 해. 절에 가서 얻어먹으면 되고…. 법정스님 상좌 하던 상원스님이 용수사 절에 계셔 거기 한번 가보셔. 탈북한 부처님1호(북에서 온 불상)가 거기 모셔져 있으니까.” 지금 세상은 ‘단풍든 시대’라 했다. 곧 우수수 떨어질 단풍 같은 세상. 삼풍백화점도, 성수대교도, 비행기 추락도, 세월호 침몰도  모두….

<숙박>

알프스모텔(태백) 033-552-2620~1
태백시 황지연못 옆에 있다. 신축건물은 아니지만 한실과 양실로 나누어져 있어 자전거 여행객에는 편리하다.

청량산휴게소민박(봉화 명호) 054-672-1447
청량산도립공원 안에 있다.

까치소리 황토민박(봉화 명호) 054-673-9779
청량산도립공원 2종지구에 위치한다. 소박하나 황토방이어서 편안한 잠을 청할 수 있다.

<교통편>

- 동서울 → 태백 06:00첫차, (1일35편/30분 간격) 심야우등(22:00/22:30/23:00)
- 안동 → 동서울 05:30첫차 → 23:00막차(1일32편/30~40분 간격), 막차심야우등
- 안동 → 센트럴(강남) 05:45첫차 → 22:00막차(1일18편/50분~1시간 간격), 막차심야우등
- 안동역 → 청량리역 무궁화 1일7편(02:20첫차, 19:20막차)
   ※동서울터미널1688-5979/안동터미널1688-8228/안동역1688-7788

<음식점>

산야초(분천)010-7289-8871

산야초식당(봉화 분천)

분천역 앞에 늘어선 음식점 중 하나. 토속음식을 팔지만 깊은 맛을 기대했다간 실망할 수도 있다. 자전거를 보고 “밥을 더 드릴까요.” 물어보는 안주인의 인심만은 넉넉하다. 곤드레나물밥 7000원, 산채비빔밥 7000원, 쇠고기시래기국밥 6000원

도산대가(안동 도산) 054-852-6660

도산대가(안동 도산)

도산서원 근처에 있다. 안동하면 간고등어다. 고등어백반이 주로 팔린다. 최근에 고등어 값이 올라서인지 2인분이 작은 고등어 한 마리를 벌려 구웠다. 맛도 친절도 보통이다. 고등어백반 1인분 8000원(2인 이상), 황태해장국 9000원

일직식당(안동) 054-859-6012

일직식당(안동역 앞)

안동역에 붙어 있는 안동간고등어 식당이다. 초립 쓰고 광고하는 안동고등어 간잡이 이동삼 명인의 집이다. 아들이 직접 운영한다. 맛집으로 소문난 지 오래다. 안동간고등어구이정식 9000원, 간고등어조림정식 1만원

<참고자료>
1. 도산구곡예던길, 이동수, 대가, 2011
2. 한국의 지형산책1/ 이우평, 푸른숲, 2007
2. 봉화군청 홈페이지
3. 청량산도립공원 홈페이지 mt.bonghwa.go.kr

<협찬>
팬텀 26XC (전기자전거)- 삼천리자전거

풍경에 건네는 말(42)   by 조용연

칼날 위로 걸었다

청량산을 발치에 두고 돌아가는 과인삼거리에서 눈에 띈 굿당 간판, 산이 깊고 영험한 곳엔 굿당도 기복의 거간꾼으로 들어서기 마련이다. 청량산도 모자라 근방의 명산 일월산까지 빌려왔다. 한 많고, 바람 거센 가시밭길 걸어온 우리네에게 굿은 물음이고, 답이고, 위안이다. 게다가 돈이면 안되는 게 없는 세상, 로또를 굿판에 끌어 들인 즉물적 작명의 용감함에 슬며시 헛웃음이 나온다.

외나무다리 그거 별거 아니다.
내 살아온 시퍼런 칼날 놓고 보면
겹겹이 놓인 칼, 골목길 마다
칼 피하다 굳은 발 낙타 발 봐라
칼처럼 살지 말랬는데
칼같이 살고 싶었는데 그도 못하고
무성한 칼집에
갈갈이 채칼에
한 끼 밥상 무나물이 되고 말았다

영검한 할매는 알지도 몰라
칼날 위에 춤도 추니
춤추는 세상 바람난 칼날이
잠드는 시간을
청량산 할배, 학인(學人), 도인(道人), 묵객(墨客)
저마다 읊었던 영탄 그 신령(神靈)에다
바다가 산에 올라앉은 시간의 자손
육육봉(六六峰)에 도와 달라 해볼까

낙타 발 내 발 어루만지고
신(神)어미 젖무덤에 반나절을 울어도
내 발 칼집에 해원(解寃)이 흘러내릴까
벼락에서 분가하는 로또
청산까지 물어물어 찾아 올 복록(福祿)일까
대명천지 이 세월
돈벼락에 숨 멎어도 좋겠네
서러운 내 발이 도로 아가 발이 된다면야

글·사진 조용연(여행작가, 前 울산지방경찰청장)
·1954년 경북 문경 출생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졸업
·경기 여주경찰서장, 서울 동부경찰서장(현 광진경찰서)
·경찰청 기획과장, 주중국대사관 참사관(북경)
·서울청 교통지도부장, 경찰청 경무기획국장
·충남지방경찰청장, 울산지방경찰청장
·현 에스원 감사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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