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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백성의 해외투어] 에스토니아에서 첫발을 내디딘 기적의 길, ‘발틱 웨이’

바이크조선 | 2015.09.2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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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기념! 자전거로 돌아본 발틱 3국과 러시아 & 북유럽 ①

‘발틱 웨이’로 불리는 ‘인간 사슬’을 따라 가는 첫 번째 여정은 북단의 에스토니아다. 미지의 세계에 들어서며 긴장했지만 미국인 자전거 여행가의 조언으로 힘을 얻었다. 젊은이 외에는 영어가 통하지 않아 답답해도 친절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향수병이 찾아들 무렵, 카레이스키 3세가 운영하는 한국식당에서 큰 힘을 얻었다.

연재를 시작하며

독자 여러분, 얼마만인가요. 지면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돌이켜보니 2002년 창간호에 저의 첫 해외투어 미국 서부 해안 3000㎞ 종주 사고(社告)가 나간 지 13년이 흘렀습니다. 그 후 미국, 뉴질랜드, 일본, 유럽 등의 기행으로 자전거 여행의 묘미와 진수를 함께 나누었죠. 이로 인해 자전거 해외투어 인구가 늘어나고, 일반인의 관심 또한 커지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입니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바로 자전거 해외투어 나가시는 분들을 위한 말 같습니다. 구석구석 돌아보며 견문을 넓히는 느림의 미학, 자전거만한 교통수단이 또 있을까요.

저는 많은 분들이 자전거로 해외에 나가기를 희망합니다. 테마가 있는 여행이라면 더욱 좋습니다.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멀지만 가까운 나라 미국, ‘바람’의 원천 유럽, 천혜 자연의 보고 뉴질랜드, 떠오르는 대륙 중국….

110년 전, 우리는 ‘너무나 밖의 사정을 몰랐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기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그때와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분단으로 인해 지정학적 환경이 더 어렵습니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자 동시에 분단 70년을 맞습니다. 같은 민족이 이렇게 긴 시간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팽팽한 긴장 속에 살고 있는 나라가 지구상에 또 있을까요! 의미 있는 광복의 해를 맞아 역사의 가르침을 되돌아보고 화합과 희망을 위한 작은 몸짓을 시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발틱 3국의 역사와 독립 스토리는 저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자전거 여행의 테마를 '기적의 길, 발틱 웨이(Baltic Way)를 달리다'로 잡았습니다. 그 길은, 인간의 감동은 어떤 무력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증명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이런 감동의 마음이 7천만 민족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지난 5월과 6월, 발틱 3국과 러시아, 북유럽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땀방울을 흘린 사연을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발틱 3국에 대하여 잠깐!

강대국에 둘러싸인 비극

“유럽에 이런 나라들이 있었어?”

1989년 당시 기록사진. 그날의 행사는 고속도로에서 많이 행해져 자전거로 발틱의 길을 전부 달린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세 나라 인구를 합쳐봐야 800만이 못 되고, 면적 역시 세 나라를 합쳐 한반도의 90%를 조금 넘는 작은 나라들-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북유럽 발틱해를 접하고 있어  발틱 3국(혹은 발트 3국)이라 말한다. 나는, 엉뚱한 비유지만, 우리의 과거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EU 회원국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아직은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와 지정학적으로 비슷한 점이 참 많다.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여 중세부터 독일, 스웨덴,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 등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 전통과 언어를 꿋꿋이 지켜왔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는 피해가지 못했다. 1939년 히틀러와 스탈린이 맺은 ‘독소불가침조약’으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세 나라는 세계지도에서 사라진다.

인간띠를 이은 650㎞의 발틱 웨이

비폭력 시위, 인간 사슬 650㎞의 기적

“비바두스!” (에스토니아)
“브리비바!”(라트비아)
“라이스베스!”(리투아니아)

주권을 잃은 지 50주년이 되는 해, 1989년 8월 23일 저녁 7시,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세 나라 국민 200여만 명이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는 손에 손을 맞잡고 인간 사슬을 만들었다. 이들은 각자 자국의 언어로 “자유를 달라!”며 목청껏 노래 불렀다.

발틱 3국지도. 에스토니아의 탈린에서 라트비아의 리가, 리투아니의 빌뉴스가까지 발틱의길이 표시되어 있다.

사슬은 속박의 상징이다. 인간 사슬은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서 라트비아의 리가를 거쳐 리투아니아의 빌뉴스까지 무려 650㎞나 이어졌다. 역사상 이보다 더 가슴 뭉클하고 평화적인 시위가 있었을까! 누구도 보지 못했고 그 어떤 상상력도 뛰어넘는 이 미증유의 인류 역사상 최대의 이벤트를 로이터, AP 등 유력 통신사들은 하늘에서 땅에서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중계했다. 역사적 행동에 전 세계 사람들이 아낌없는 공감과 지지를 보냈다.

결과는 엄청났다. 많은 이들이 ‘감동이 불러온 기적’이라고 했다. 이듬해 리투아니아를 필두로 세 나라 모두 꿈에도 그리던 독립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어냈다. 인간의 간절한 염원이 만들어낸 이 아름답고도 놀라운 퍼포먼스-인간사슬의 길을 ‘발틱 웨이(Baltic Way)’라 부른다. ‘인간이 만든 가장 긴 띠’로 기네스북에 올랐고,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제1화 에스토니아(Republic of Estonia)

자유를 향한 200만 명의 염원이 한데 모여 독립을 이뤄낸 ‘역사의 길’을 자전거로 달린다! 그 부푼 기대를 안고 여정을 시작한 첫 출발점은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 2011년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되면서 북유럽 관광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는 곳이다. 그렇게 해외투어를 다녔지만 무대에 선 초연 배우처럼 설레는 마음 억누를 길 없다.

헬싱키에서 페리를 타고 핀란드 만(灣)을 건너 에스토니아 탈린 항으로 입국했다. 바닷길은 80㎞에 불과하지만 입출항 수속 등으로 3시간 정도 걸렸다. 내가 탄 배는 ‘실야 라인’의 거대 호화 페리로, 면세점은 물론 식당도 여럿 있었다. 운임은 요일별, 시간대에 따라 크게(30~60유로) 다른 점이 특이했다.

탈린행 배에서 만난 마틴씨. 그는 내게 많은 정보를 주었다.

다시 무대에 선 초연 배우처럼, 그리고 뜻밖의 조력자

마침 배에서 마틴이라는 친절한 미국의 노(老) 자전거 여행가를 만나 지루한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발틱의 길’ 여정 첫 번째 인연이다. 여러 차례 발틱 3국을 여행했다는 그는 내게 다양한 정보와 함께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우선 “접이식 자전거(Tern)는 탁월한 선택”이라고 말해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출발의 조짐이 좋다.

“발틱 국가들이 EU 가입 국가이기는 하지만, 공산 치하에서 독립한 지 20여 년밖에 안 되기 때문에 자전거 문화나 기본 인프라 시설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톰페아 언덕에서 내려다본 탈린 전경. 멀리 탈린항이 보인다.

마틴은 ‘발틱의 길’ 자전거 여행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과 격려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발틱 웨이’, 즉 인간 띠(Human Chain)의 길은 수도와 수도를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대부분이라 사실상 자전거 통행은 어려워요. 하지만 발틱 3국에서 자전거로 달릴 수 있다면 그것이 다 ‘발틱의 길’ 아니겠습니까.”

그는 “철도는 러시아로부터 물려받은 그대로 아직 구식이다. 그러나 고속버스는 빠르고 편리하며 화장실까지 갖춘 최신식”이라며 좋은 정보도 주었다.

마틴은 마지막으로 “라이딩할 때 교통사고에 각별히 조심할 것”과, “시장경제 체제가 확립될수록 빈부격차가 커져 자전거 도난이나 소매치기가 심하니 이 또한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길을 물어볼 땐 “가급적 젊은 사람에게 해야 수고를 덜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발틱의 길

문화며 언어며 워낙 생소한 지역이라 적잖이 긴장했지만, 친절한 마틴과의 대화로 다소 마음이 안정되었다. ‘다 사람 사는 곳인데 한번 닥쳐보자! 지금까지 초야의 걱정은 한 번도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하며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탈린 항에서 힘찬 첫 페달을 밟았다.

중세시대 유럽의 골목을 거닐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단출한 차림으로 구시가지 돌아보기에 나섰다. 인구 40만 정도인 탈린의 볼거리는 바날린(Vanalinn)이라고 불리는 구시가지에 다 모여 있다. 탈린 항에서 불과 2㎞ 내외, 걸어서도 무리 없는 거리다.

페달을 밟으며 구시가를 주유하니 감동적인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어낸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역사는 사람이 만들고, 기적 또한 사람이 만드는 법. 그래서일까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가 역사의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카타리나골목 탈린 구시가지의 대표적 거리

발틱 3국은 중세시대 고성과 거리를 그대로 보존한 곳이 많다. 그래서 유럽의 과거와 최근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곳 탈린의 구시가지 역시 한자동맹(중세시대 독일 북쪽과 발틱 해 연안에 있는 여러 도시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연맹. 주로 해상 교통의 안전을 보장하고, 공동 방어와 상권 확장 따위를 목적으로 했다.) 당시 무역으로 번성해서 이룬 중세의 분위기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건물 곳곳에 길드시대에 쓰던 도르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물류의 이동이 빈번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곳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카타리나 골목(Katariina kaik). 과거에는 카타리나 수도원에 이르는 곳이었다. 현재는 없어졌지만 당시 수도원에 안치되었던 망자, 즉 고관대작들의 비석을 골목 벽에 붙여놓아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 오래된 성벽과 붉은 지붕들, 세월에 풍화된 돌담에 돌바닥의 골목길이 이어졌다.

헤매는 나를 한식당까지 데려다준 친절한 에스토니아인

‘마카담 도로’(유럽 중세의 마차를 위한 돌길) 위를 자전거로 달리니 충격이 심해 시속 10㎞를 넘을 수 없었다. 내 애마 턴은 ‘서스펜션’이 없기 때문이다. 1.5인치로 할까 망설이다 1.75인치 타이어를 장착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타이어 공기압을 좀 줄여주니 덜 튀어 타기가 한결 수월했다.

그 옛날 완충장치가 없는 마차를 탄 ‘귀족들의 엉덩이도 편치 못했으리라’고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지금도 수공업 공방들의 조합인 카타리나 길드가 있고, 골목 양편으로 아기자기한 공예품,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어 중세스러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하고 있다.

일명 쌍둥이 탑이라 불리는 비루(Viru) 문으로 들어서면 고딕 건물의 양식이 즐비한 시청광장이 나온다. 건물의 규모나 그 웅장하고 세심한 예술성을 보는 순간, “아, 여기도 엄연히 유럽의 화려했던 영화를 간직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로마나 파리, 피렌체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맛-그것을 즐기는 것 또한 이번 여행의 커다란 즐거움이다.

한식당 주인 세르게이의 아내 비예리. 러시아인으로 젊었을 때는 아주 미인이었다고

탈린에서 전망 좋은 ‘톰페아 언덕’은 빼놓을 수 없는 곳. 현재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는 톰페아 성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탈린 항구와 신·구 도심의 조화를 이루는 건물들이 눈 아래에 펼쳐진다.

‘아리랑’ 식당에서 발견한 한국인의 저력

여행의 리듬이 안정된 궤도에 접어들면 슬그머니 잊고 있던 ‘집밥’ 생각이 나는 법. 여행에서 가장 큰 적은 향수병이다. 치료약은 ‘한식’밖에 없다.

집 떠난 지 열흘이 넘어가자 문득 쌀밥과 시큼한 김치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여행 안내소에 한국식당이 있는지 물었다. “시 외곽에 한 군데 있다”고 했다. 도대체 어떤 분이 여기까지 와서 한국식당을 할까? 궁금증이 앞섰다. 그러나 그 식당은 지도만으로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스마트폰 내비로도 별무효과! 이 나라 젊은 사람들은 그런대로 영어가 통했지만 중장년층은 차라리 몇 마디 할 줄 아는 러시아어가 더 유용할 정도였다.

세르게이 마가이

우선 거리에 사람이 없어 물어볼 수조차 없다. 운이 따랐을까… 말쑥하게 생긴 한 중년 남자가 저만치 눈에 띄었다. 얼른 페달을 저어 다가가 지도를 들이대고 물었다.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당신은 지금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어요. 나를 따라오시오.”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무얼 믿고?’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어쩔 수 없지. 이것도 여행운’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다시 한 번 그의 눈을 보고는 순순히(?) 그를 따라 차가 있는 곳으로 가 몸을 실었다. 마침 그의 차는 대형 픽업트럭으로 자전거를 싣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식당 이름은 ‘아리랑’이었다. 자전거를 내린 다음 남자를 향해 작별인사를 했다. “스빠시바!”(노어로 ‘감사합니다’란 뜻)를 연발하니 “다스비다니야!”(노어로 ‘잘 가시오’) 하고는 훌쩍 돌아서 가버렸다. 러시아계 사람이 분명했다. 러시아 등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친절이나 서비스의 개념이 매우 희박하다. 무뚝뚝하지만 처음 본 이방인을 목적지까지 직접 차를 태워다준 그의 친절은 에스토니아인에 대한 좋은 인상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한식당

우여곡절 끝에 찾아든 식당의 주인은 카레이스키 3세, ‘세르게이 마가이’라는 고려인이었다. 그는 어눌한 한국어로 “러시아 연해주에 살던 할아버지가 1937년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당해 그곳에서 태어났다”며 어렸을 적부터 부친에게서 들은 ‘디아스포라(이산)’의 아픔을 풀어놓았다.

고려인이란 일본의 압제를 피해 연해주에 터를 잡고 모진 고생 끝에 안착한 사람들이었다. 일본이 중국과 만주에서 급속히 세력을 키우자 불안감을 느낀 스탈린은 조선 사람을 ‘일본의 스파이’로 몰았다. 차마 죽일 수는 없어 머나먼 중앙아시아로 강제 소개시킨다. 단 3일의 시간만 주어졌다. 그들은 피땀 흘려 이룬 전, 답, 집, 가축, 세간살이 모두를 두고 떠나야만 했다.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러시아군은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세르게이는 말문을 잇지 못했다.

타르투 대학생 티나양

여러 날 기차 속에서 시달리던 그들은 탈수, 굶주림 등으로 많이 죽었다. 시체는 달리는 차창 밖으로 그냥 던졌다고 한다. 살아남은 자들은 소위 ‘스탄’이라고 이름 붙은 중앙아시아 나라들에 나뉘어 강제로 내던져졌다. 이때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때가 늦가을이라 ‘얼어 죽었다’고 했다.

세르게이의 할아버지는 우즈베키스탄에 내려져 “땅을 파고 거적을 덮어 그해 혹독한 겨울 추위를 넘겼다”고 하니 그때의 고통이야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생명은 모진 것, 그런 중에도 새 생명은 태어났다. 따져보니 그는 나와 같은 51년생 토끼띠였다. “나도 6·25전쟁 중에 세상에 나왔소” 하며 동시대를 같이 살아온 우리는 손뼉을 부딪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 후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를 전전한 끝에 에스토니아까지 흘러온 인생유전(人生流轉)-세르게이를 통해 한민족의 강인한 생존력과 ‘나라가 있다는 현실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새삼스럽게 느꼈다.

대학 구내에있는 13세기 대성당의 흔적. 그옛날에 이런 건물이! 현재도 일부는 대학 박물관으로 사용되어 관심있게 관람을 했다.

“아니! 자전거로 발틱 웨이를?!”

그는 내 여행 계획을 듣고는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정말 대단한 일을 혼자 하시는군요. 당신이야말로 끈질긴 한국인입니다!”

그는 활짝 웃으며 나를 향해 엄지를 곧추세웠다. 곧이어 주방장인 러시아인 아내를 불러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를 푸짐하게 내왔다.

“밥아! 너 본 지 오래구나!” 

간만에 차려진 한식상 앞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순식간에 게눈 감추듯 그릇을 비웠다. 먼 이국에서 느낀 한민족의 끈끈한 정. 그 ‘밥심’ 덕분에 다음 목적지 타르투로 갈 새로운 힘을 얻었으니, 이것이 바로 자전거 여행이 주는 ‘우연의 행운’이 아닌가 싶다.

타르투의 호스텔에서 만난 타야씨. 나에게 무척 친절하게 대해줬다. 합살루란 곳에서 대학에 출장차 왔는데 꼭 자기가 사는 합살루를 방문해달라고 했다.

문화도시 타르투에서 만난 여대생 티나

에스토니아, 아니 발틱국을 알기 위해서 타르투는 꼭 들러야한다. 겨우 10만 명이 사는 한적한 시골 도시지만 문화, 예술, 과학 등 에스토니아 정신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북유럽 전체에서도 최고(最古)의 대학교 중 하나인 타르투 대학교(1632년 설립)를 필두로 교육부, 최고법원, 국가기록원, 과학단지 등 여러 가지 중요 기관들이 모여 있다.

우선 타르투 대학을 찾았다. 한곳에 각 단과대학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 언덕 너머에도 몇 개의 대학이 있다. 캠퍼스 안에는 13세기에 지은 성당이 뼈대만 남아 고풍스런 중세 대학의 멋을 풍긴다. 야트막한 동산을 구름다리로 건너가면 이 대학 출신 유명 문인이나 과학자의 동상이 있어 산책하며 사색하며 그들을 만날 수 있다.

타르투의 발랄한 아가씨들. 한류에 빠져있다고 했다. 젊은이들이 이런곳을 자전거로 많이 여행했으면 좋겠다. 로맨스도 생길듯!

마침 도서관 앞에서 공부하다 휴식 중인 티나 양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러시아 교류학과’ 졸업반이라고 했다. 졸업 후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물었더니 서슴없이 “외교관이 되어 해외로 나가고 싶다”고 했다. 같은 과 친구들도 “서유럽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고 했다.

“두뇌 유출이 많으면 에스토니아는 앞으로 누가 끌고 가죠? 희망이 없다는 건가요?”

나의 물음에 티나는 웃으며 말했다.

“임금이 낮으니 별수 없죠, 뭐. 결혼이나 내 집 마련은 꿈도 못 꾸어요. 그렇지만 잘될 거예요.”

에스토니아의 미인

그녀는 일어나면서 짧은 미소를 짓고는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어느 나라나 젊은이들과 이야기해보면 취업과 여행이 큰 관심사다. 연애나 결혼, 출산 ‘3포’(抛)는 기본이고 ‘5포’(house & social relation)까지 등장하니 생존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인 듯.

발틱국을 여행하며 영어가 통하는 젊은이들과는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다. 반면 중장년층과는 대화를 못했던 것이 아쉽다. 이 지역을 여행할 계획이 있다면 러시아어와 키릴 문자를 좀 익혀두면 상당히 유용할 것 같다.

에스토니아 아가씨들은 친절하다.

발가(Valga), 한 도시 두 국가(one city two states)

타르투를 떠나 남으로 약 80㎞ 내려오면 라트비아와의 국경선이 나온다. 거기에 발가라고 하는 인구 2만 명 정도의 소도시가 있다. 흥미로운 곳이다. 도시를 가로질러 국경선이 지나므로 ‘한 도시 두 국가’란 별칭이 있다. 1만5000명이 에스토니아에 거주하고 나머지는 라트비아에 산다. 과거 베를린을 연상케 하는 도시다.

지금은 EU로 통합되어 국경검문소의 흔적만 초라하게 서 있다. 인간이건 사물이건 제 역할을 잃는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러시아 치하에서는 엄격하게 비자를 받아야만 왕래가 가능했다. 지척에 둔 친척을 만나기 위해 일주일을 기다렸다거나, 양국 청춘남녀가 국경을 몰래 넘나들며 데이트하다가 발각돼 혼이 났다는 에피소드만 내려오고 있다.

발틱의 길.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국경을 넘으니 라트비아다. 당장 말씨부터가 다르다. 발가가 아닌 발카(Valka)다. 시내를 주유하다 보니 두 나라를 여러 차례 넘나들었다. 양국 마트에 다 들어가 간식거리를 사보았는데 라트비아가 좀 비싼 것 같았다.

경제 사정이 좀 나은 에스토니아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25유로짜리 B&B. 깨끗한 방에 아침도 먹을 만했고 주인도 친절했다. 말은 한마디도 통하지 않았지만.

탈린이나 타르투 같은 대도시(?)와는 달리 지방으로 갈수록 안전하고 물가도 저렴했다. 게다가 숙소 찾기도 쉽다. 무엇보다 넉넉한 인심이 마음에 들었다. 의사소통의 불편함만을 빼고는! 하기야 소통할 일도 별로 없을 것 같으니, 지친 몸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며칠 쉬어가고픈 생각이 굴뚝같이 솟아올랐다. <다음호에 계속>

협찬 : LS그룹, OD BIKE, 아조키코리아, 엠핀스포츠, (주)호상사

글·사진 차백성(자전거여행가)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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