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강·가화천(산청·진주·사천)
백두대간의 끝, 마지막 강이 덕천강이다. 한반도를 타고 내려온 맏형격인 이 큰 산줄기는 지리산을 낳고서야 방점을 찍는다. 남덕유산의 물을 품은 남강도 천왕봉과 중봉의 골짜기를 타고 내린 덕천강을 안고서야 비로소 지리산의 물이라 할 수 있다. 그 큰 그릇이 진양호이고 남강댐이다. 남강의 물이 넘쳐서야 가화천은 제 구실을 한다.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견디다 수문을 열 때, 쏟아져 내리는 가화천 물이야말로 제대로 ‘삼천포로 빠진다’
지리산 중봉에서 흘러내린 물은 조개골을 어머니로 하여 덕천강의 발원이 된다. 사람이 사는 제일 높은 곳, ‘하늘아래 첫 동네’라고 문패를 건 새재마을에 이를 때까지 사람 구경을 할 수 없는 원시림이다. 서너 채 있는 윗새재마을은 치밭목대피소를 거쳐 가장 빠르게 천왕봉까지 오르려는 사람들의 베이스캠프 격이다.
지리산 정수리의 물, 하늘 아래 첫 동네로
해발 700m의 마을, 옛 사람들은 높으면 ‘새’를 붙여 고개이름을 지은 것인가. 대원사까지 5㎞는 경사가 급하다. 페달을 얹은 채로 저절로 나는 속도를 걱정하며 내려가야 한다. 작은 버스 한 대 제대로 못 들어오는 골짜기다 보니 불편이 많았으리라. 군데군데 피양하는 공간을 만들면서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다. 역시 우려되는 것은 편한 만큼 쉽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흔적과 그들로 인한 생채기다.
계곡에 자리 잡은 명찰(名刹)은 그 골짜기의 끝에 위치해서 더 이상 민가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데 새재마을이 있는 유평리는 절과도 십리 이상을 멀찌감치 상류쪽에 떨어져 있다. 그만큼 골짜기가 깊기도 하단 얘기다.
귓전이 소란스러울 정도로 우렁차야 할 계곡물도 풀이 죽었다. 보통 죽은 게 아니라 기다시피 흐른다. 가뭄의 영향에서 피해 나갈 수가 없었나보다.
평촌리 명상3거리에 이르면 평촌천물과 합해져 제법 하상의 폭이 넓어진다. 산청에서 죽어라고 꼬불탕거리며 기어올라 와야 올라서는 밤머리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더해져서다. 삼장야영장이 강 옆에 길손을 받고 있다. 삼장(三壯)은 산장(山壯), 수장(水壯), 인장(人壯)이라하여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긍지다.
삼장면 소재지는 내원사를 끼고 있는 장단계곡이 있으나 종심이 깊지 못하고, 2.5㎞ 남짓 아래에 시천면 소재지에 덕산장이 서고 있어 더 이상 발전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지리산 두 물이 모이는 장, 덕산장터
마침 덕산장날이다. 장터는 천왕봉에서 시작하는 시천천과 세석평전에서 시작하는 내대천 물이 덕천강 본류와 만나는 합수머리에 펼쳐진다. 사람이 없는 건 시골장터의 이즈음 풍경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5일장의 냄새를 제대로 풍기기 위해 뻥튀기장수도 옥양목 한복을 어색하게 입었다. 장비도 시커머튀튀한 기계가 아니라 이즈음 입식으로 개량한 것이라 기억속의 향수를 끌어내기엔 역부족이다. 장꾼들의 운송수단인 마차가 섰던 자리에는 1톤 트럭이 나란히 오(伍)를 지어 파장을 기다리고 있다.
덕산장이 보통 장이 아닌 것은 1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62년 2월 열흘간의 일이다. ‘진주농민항쟁’으로 기록된 이 거사는 양반 류계출이 주도했다. 수탈에 대한 불만뿐이 아니라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기개가 담겨 있었다. 민초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5일장을 철시하면서까지 분출했던 개벽의 간절함은 결국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의 전조였는지도 모르겠다.
장터를 찾은 장꾼들도 더위를 피해 정자에 앉아 막걸리 한 잔에 한담이 한창이다. 물이 워낙 말라 그렇지 장마가 지면 보통 물길이 아니겠다. 시천면에는 산청양수발전소가 있다. 문자 그대로 전력수요가 적은 한밤중에 물을 상부댐으로 퍼 올려 발전하는 방식의 댐이다. 물주머니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댐들도 제한 발전과 급수를 하는 판인데 이 작은 양수댐의 발전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정자 옆에 시비 하나가 서 있다.
아침부터 젖었다/ 오정 무렵 되어서는/
막걸리집 파전 내음도 젖었다/ 장옥너머 넘실거리는/
덕천강 물소리도 젖은 채 간다/
만물상회 트럭도 구곡산 중허리까지 내려온/
낮은 하늘도 젖었다/ 널평상에 드러누운 생선들도/
오다가다 질척거리는 하루가 다 젖었다
(‘덕산장 장마’ 전문, 조종명)
아마 경남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인인 그가 창녕 조씨(曺氏)인 걸로 보아 남명 선생의 후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조선제일의 빳빳한 선비, 남명 조식
이곳 시천은 온통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을 빼곤 말이 되지 않을 법하다. 무엇이 500년 전 한 선비를 이렇게 절절하게 기억하게 만드는가. 그의 사람 됨됨이와 영향력을 살펴보지 않고 무심히 이 마을을 지나가는 것은 무례하다. 개인으로 보자면 남명은 지리산에 10번을 오르고 천왕봉이 보이는 곳이자 중봉에서 내려오는 덕천강과 천왕봉에서 내려오는 시천천이 합쳐지는 곳에 자리를 잡고 산천재(山天齋)라 불렀다. 조선유림의 거목으로서의 남명의 줄기는 뚜렷하다. ‘좌 퇴계 우 남명’이라 했다.
낙동강을 기준으로 두 선비의 위치가 확실하다. 퇴계가 그다지 높지는 않았어도 단양과 풍기군수를 역임한데 비하면 남명은 거듭되는 관직에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묻혀 살기를 고집하고 문하들만을 키워냈다. 합천 사람인 그가 고향이 아니라 지리산자락에 묻힌 것도 지리산의 정기를 훑어 내린 합수머리에 산 것과도 무관치 않다. ‘유두류록(遊’頭流錄)이란 책에 실린 남명의 시조 한 편이 그 답이다. 두류산은 곧 지리산이다.
두류산 양단수를 녜 듣고 이제 보니
도화뜰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메뇨
나난 옌가 하노라
(‘두류산가’ 남명 조식)
얼마나 대단한 선비였으면 선조대왕이 직접 그의 영전에 제문을 내려 푸른 선비의 기상을 기렸을까. 산천재에는 근자에 세운 비석이 그 내용을 전한다. 청소년들에게 선비의 정신을 맛보하게 하는 조선선비문화관이 이제 갓 만들어져서 덕천강가를 더욱 넉넉하게 한다.
시천면 소재지인 덕산을 벗어나면 강은 20번 국도와 나란히 달린다. 전형적인 선행곡이다. 지각상승에 의해 산맥이 형성되는 속도보다 하방침식의 속도가 더 빠른 경우 생성되는 것이 선행곡이다. 바로 선행하천(Antecedent river)이다. 당연히 국도에서 강이 내려다보일 수밖에 없다. 경사도 급하고, 침식이 부활되며 하상은 커다란 돌들이 자리 잡는다. 덕산에서 두양리까지의 구간이다.
길이 넓게 새로 뚫린 덕분에 시간을 단축해 도시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은 잘된 일이지만 옛길에서 성업하던 주유소가 망해버린 모습은 흉하다. 그러나 거기에 커피 꽃이 피었다. 자동차를 받쳐놓고 의자를 뒤로 젖힌 커피장수가 도무지 오지 않을 길손을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옛 주유소 스탠드의 철거비용조차 아까운 것이다.
지리산고등학교, 배꼽인사를 잊지 않는 아이들
창촌삼거리에서 1005번 지방도로로 접어든다. 두양교 못 미쳐서는 또 21번 군도로 접어든다. 그래야 덕천강에 가까이 붙어서 내려가는 것이다. 예닐곱의 아이들이 배꼽인사를 한다. 예기치도 않은 인사에 엉거주춤 인사를 하면서 그들이 지리산고등학교 학생들임을 알게 되었다.
대안학교는 우리의 보통 중고교 교과과정보다는 자유로운 학교다. 여전히 부적응과 별난 아이들을 연상하는 것이 우리들의 한계다. 그러나 낯선 길손에게 공수로 인사(배꼽인사)를, 그것도 수염이 거뭇 자란 고등학생들이 그리 할 수 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다. 어떤 학문과 지식을 배웠는지는 접어두더라도 그 인사 하나 만으로도 그들의 인성은 완성에 가까워 있는 게 아닐까. 국내 최초로 무동력 요트를 타고 세계 일주를 성공한 해양모험가 김승진 선장이 “지식보다 무서운 것이 예의다. 평범한 예의가 성공으로 이끄는 가장 큰 무기이며, 소통의 출발이다.”라고 한 말은 의외지만 백번 맞는 말이다.
‘예의’를 제일로 든 것은 세상의 준엄한 질서에 대한 스스로 우러나오는 승복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결국 그 해양 모험가도 망망대해에서 삼킬 듯이 다가오는 파도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인내와 고독의 싸움을 넘어서 자연에 대한 순응과 경배의 예절밖에 더 할게 없었다는 말 아니겠는가. 이제 길은 평탄하다. 강둑길로 올라갈 수도 없다. 군데군데 경작을 하고 있는데다 엉겨있는 풀섶이다. 두양에서 진주시 수곡까지는 하천이 넓어지고, 범람원이 발달하며 군데군데 수중보도 있다. 밋밋한 시골길은 차들 통행도 뜸하다. 큰 느티나무 아래 로드바이크를 세워둔 채 쉬는 중년의 남자는 그늘을 나누어 쉬자고 권한다.
들꽃이 핀 이 길이 마음에 들어 자전거에 푹 빠지게 되었다는 남자는 하동 옥종으로 한 바퀴 도는 이 코스를 자랑스러워한다. 젊은 동호회원들이 덕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내려 올 동안 그는 유유자적하며 바퀴를 굴릴 작정이란다. 힘을 경계로 세월이 나누어 놓은 서로의 길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뿐 어차피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문암교를 지나면 이충무공 진배미유적지가 나타난다. 주변의 모함과 선조의 명을 거역한 죄로 옥살이를 하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 받은 충무공이 군사들을 훈련시키던 곳이다. 길가에는 검은 오석으로 된 백의종군로 표지석이 이 길의 역사를 말해준다. 화개에서 합천 율곡으로…. 백의종군로는 경상도에 161.5㎞, 전라도에 125㎞라고 전한다. 서울 의금부에서 남원 운봉초등학교까지의 구간 340.2㎞를 더하면 총 640.4㎞의 백의종군로가 고증, 완료되었다고 한 대학의 이순신연구소는 발표했다. 이순신 장군도 덕천강물 소리를 들으며 군사들의 검에 힘을 실었을 것이고, 천왕봉을 바라보며 왜적을 소탕하겠다는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남강에 묻혀 버린 나루터와 금성습지
덕천교에서 1001번 지방도는 진주 수곡과 하동 옥종으로 가는 길로 나뉜다. 강물은 더 속도가 느려져 호수를 닮아 간다. 옥종중학교 교가에 등장하는 양단수도 여기쯤 해서는 뒷짐 지고 팔자걸음이다. 남강에 댐이 생기고 진양호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거대한 백사장도 있었던 곳이 모두 습지로 바뀌었다. 원래 곤명면사무소가 있던 곳이 본촌리다.
부자가 많았다는 양달마을 앞을 지난다. 완사역이 보이는 금성습지는 반달모양을 하고 젊잖게 자리 잡았다. 거기쯤에서는 지리산의 천왕봉과 중봉을 온전히 조망할 수 있다. 정작 지리산 품에서는 지리산을 제대로 볼 수 없다. 한 겨울 금성습지에서 눈 덮인 지리산을 보는 것은 알프스를 연상케 한다는 주민의 고향사랑은 풍이 섞여 있긴 하지만 흐뭇하다.
완사역은 경전선 열차가 진주에서 출발해서 첫 번째로 서는 간이역이다. 경전선도 시골길을 빙 둘러가는 낭만의 시대를 마감하고 있다. 진주 쪽 유수역도 하동 쪽 다솔사역도 모두가 이제는 역두의 흔적과 이름으로만 남았다.
완사(浣紗)는 빨래를 한다는 뜻이다. 수많은 전설의 주인공 옥녀가 여기도 등장한다. 비단을 짜서 빨래를 하던 옥녀를 보고 반한 민도령, 과거급제를 하면 결혼하자는 두 사람의 약속, 옥녀를 탐낸 사또는 질투로 민도령을 위한 옷감을 가위질하고, 옥녀는 덕천강에 빠져죽고, 사또는 원인불명 급사하고, 과거급제하고 금의환향하던 민도령도 투신한다는 비극적 스토리. 그 후 혼인 행차하는 가마마다 횡액을 당하니 옥녀봉이라 이름 짓고 완사라는 지명을 붙여주어 원혼을 달랬다는 이야기다. 옥녀봉은 그렇게 금성대교에서 건너다보이는 진양 호반에 봉긋이 솟아 있다.
가장 짧은 국가하천 가화천, 사천만 삼천포로
지리산의 육즙을 훑어낸 덕천강이지만 진양호에 안기고 나면 허전하다. 금성대교에서 7번 군도와 진수대교를 거치는 1049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삼계교에서 가화천을 만난다. 이 강이 삼십리 남짓함에도 어찌 국가하천인가. 남강댐의 옆구리에서 출발하는 운명 때문이다. 가화천은 남강댐에 물이 넘치는 홍수 때야 비로소 수문을 여는 방수로다. 하지만 국가하천이면서도 새끼(지류하천) 하나 못 거느린 불임의 강이다. 낙남정맥(洛南正脈)을 끊어 인간의 힘으로 만든 운하와 같아서다. 그 과정에 드러난 지층엔 백악기 공룡의 발자국 100여개가 남아있어 천연기념물 390호(1997년)가 되었다. 졸지에 가화천이 생긴 정동마을과 우거동 사이에는 수없이 떠내려간 징검다리를 대신할 콘크리트 우다리(雨橋)가 놓이기도 했다.
가화천은 강둑이랄 것이 없다. 강변을 따라가던 길도 제 수명을 다해가는 유수철교를 지나고 나면 산 위로 올라붙는다. 한탄강을 닮은, 푹 꺼진 골짜기로 물길이 사라진다. 강물 줄기를 다시 만나려면 축동IC를 지나서 가산교에 이르러야 한다. 가화천도 비로소 삼천포 바다에 안긴다. ‘삼천포로 빠진다’고 했다간 속된 말을 썼다고 발끈할 사람이 있을게다.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의 대여섯 개 유래 중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것은 경전선과 진삼선(진주~삼천포) 열차 환승 착오설이다. 진주 개양역에서 갈아타라는 안내방송을 잘 못 들어 진주, 순천으로 갈 손님이 그만 삼천포로 가버리고 말았다는 거다. 실제로 나도 일본의 아타미(熱海)에서 차내 방송을 전혀 알아듣지 못해 똑같은 낭패를 본 일이 있다. 생각지도 않게 이즈반도(伊豆半島)의 종점까지 가버리고 말았다.
남쪽 끝 아름다운 포구와 ‘삼천포 아가씨’ 노랫말에 담긴 로망은 여전히 은근한 유혹이다. 남해고속도로 어디쯤엔가 ‘삼천포로 푹 빠지세요.’라고 역설적인 야립(野立) 광고를 세운다면 삼천포 사람들이 화를 낼까?
강물이 바다에 안기는 건 자연의 이치건만 사람 힘으로 조작되는 가화천의 수량에 따라 사천만의 생태계도 영향을 받는다는 논란은 그치지 않는다. 그래도 어쩌랴. 남강댐에서 가화천으로 성난 물줄기를 조금이라도 빼주는 덕에 가까이는 함안, 의령에서, 멀리는 낙동강 하류까지 홍수피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데야.
<여행 만들기>
산청에서 자전거로 대원사 계곡을 가려면 하늘 가까이 까마득히 걸려 있는 밤머리재를 넘어야 한다. 덕천강의 발원지인 조개골 새재마을까지 가는 길이 고되지만 강 따라 내려오는 길은 충분한 보상이 된다. 아무래도 대중교통을 이용한 귀경은 진주가 심야고속버스까지 있어 접근하기 좋다. 지원해 줄 사람이 있으면 자동차를 이용하는 편을 권한다.
<강둑길에서 ‘못’ 만난 사람>
산청군 단성면 덕천강가의 느티나무 아래서 만난 자전거 마니아다.
3년 전부터 자전거를 시작해 푹 빠져 있다. 지나는 자전거를 불러 세워 쉬어가라고 권할 만치 붙임성도 좋다. “젊은 친구들 하고 같이 출발했는데 네 명이 덕천강을 거슬러 올라갔지요. 나는 여기서 하동 옥종으로 돌아 진주로 가요. 이래저래 70~80㎞가 넘지요.” 처음 자전거를 타면서 강가에 핀 찔레꽃 향기에 반해 더욱 자전거를 열심히 타게 되었다고 자랑이다. 한사코 이름 밝히기를 꺼려 그냥 느티나무 아저씨라 부르니 그는 만나도 못 만난 사람인 셈이다.
2013년 낙동강에서 섬진강까지 강둑길 여행을 하다 만난 하동 북천의 할머니가 생각난다. 그 날도 허리가 아파 하동 옥종면에 유명한 한의사에게 침 맞으러 간다면서 길에서 인사를 나눴다.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사신다 했다. 당신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책을 받고는 꼭 한 번 지나는 길에는 들리라고 했는데 또 일정에 쫓겨 생각만 하고 만다. 덕천강 서편에 있는 옥종면 거기서 시오리 가면 북천인데…. 할머니 허리가 더 아프시지 말아야 할 텐데,
<숙박>
유평계곡 민박촌
유평민박, 대원민박 등 몇 개 업소가 대원사 지나 계곡 상류에 있다.
리앙스모텔(산청) 055-972-7756
산청시외버스터미널 앞에 있다. 대형, 소형 온돌방도 있다. 성수기, 비수기로 나누어 요금이 다르다(4~5만 원대).
<교통편>
- 서울남부 → 산청 08:30첫차(1일8편), 23:00막차(심야우등)
- 진주 → 서울경부 05:00첫차, 21:00 막차(30분 간격), 심야우등 3편 별도
- 서울남부시외버스터미널 02-521-8550 /
진주고속버스터미널 1688-0091 / 산청합동버스터미널 055-972-1616
<음식점>
천황식당(진주) 055-741-2646
유명한 진주비빔밥의 대표적인 업소다. 여행을 마무리하며 고속버스 상경시간을 넉넉히 잡고 석쇠불고기에다 비빔밥 맛을 보면 피로가 풀린다. 진주비빔밥 9000원, 석쇠불고기(1접시) 2만원
금성식당(산청) 055-972-9416
시천농협 근처에 있다. 주로 찌개류의 식사를 내놓는다. 김치찌개·된장찌개 7000원, 갈치찌개 9000원
완사식육식당(사천) 055-853-2120
완사역 근처에 위치한다. 고깃집이지만 단품 메뉴도 맛을 보장한다. 육회비빔밥 6000원, 국밥 6000원
<참고자료>
1. <한국의 발견> 경상남도, 뿌리깊은나무, 1989
2. <지리산 인문학으로 유람하다> 강정화·최석기, 2010
3.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우리 선비> 정옥자, 현암사, 2002
4. <앵글 속 지리학(상)>, <진양호의 방수로 가화천>, 손 일, 푸른 길
5. 산청군청, 곤명면사무소 홈페이지
6.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7 http://blog.naver.com/nstdaily 등
<협찬>
팬텀 26 XC (전기자전거) - 삼천리자전거
풍경에 건네는 말(41) by 조용연
할매, 나 심심해
딱히 그리울 것도 없는 장날
소등짐 나무단 가득
워낭소리,
달구지 쇠바퀴
자갈 튀는 소리 섞여 날아간 바람
난전에 끓던 국밥
대파 속알이 문드러지도록 춤추더만
이고 지고, 장터걸로 가던 날이
허망의 그물 사이로 그리 가고
조선 발솥 퉁퉁한 육덕
퍼질러 앉아 셈도 않던 세월
어느 천 년에 엉덩이를 들까 싶더만
종종걸음 치고 말았네
흔전만전 물건 넘치는 세상
고기 안 들어간 된장찌개 없는 세상
파장도 없는 장꾼들이 어데 다 숨었나
흥정도, 구경도 시들하다
잡을 데라곤 할매 치마꼬리밖에
엄마 없는 세상에 성긴 할매 수세미 손 밖에
할매, 나 심심해
글·사진 조용연
·1954년 경북 문경 출생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졸업
·경기 여주경찰서장, 서울 동부경찰서장(현 광진경찰서)
·경찰청 기획과장, 주중국대사관 참사관(북경)
·서울청 교통지도부장, 경찰청 경무기획국장
·충남지방경찰청장, 울산지방경찰청장
·현 에스원 감사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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