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 막강 장딴지 부부의 유럽 자전거 여행기 (下)] 자전거 안장 위에서 만난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감동
글·사진 | 이남석 서울 성동공고 교사 | 2014.12.24 10:52
올림포스산 넘어, 아테네로 가는 시골 길
베네치아에서 슬로베니아 국경까지는 한나절 정도 걸렸다. 운하를 건너고 들판을 따라 달린 길은 ‘비아 안니아(Via Annia)’라고 불리는 로마시대 때 건설된 도로였다. 사람이 만든 구조물이나 유적은 늘 한자리에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만이 태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오래 가리라 생각했던 견고한 유적들도 어느 순간에는 사멸하고 마니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로마시대의 길을 아내와 나의 자전거 두 대가 나란히 달렸다.
국경이 가까워지면서 우리는 슬로베니아를 거쳐 자그레브로 갈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국경도시인 트리에스테로 가서 크로아티아로 입국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결국 전자를 선택했다. 고리지아에서 슬로베니아 국경을 넘어 수도인 류블라냐까지는 하루에 가기에 힘든 여정이었다. 설상가상 국경에서 비를 만났다. 춥지 않은 날씨라지만 겨울인 데다 옷이 비에 젖어 이날은 야영 대신 호텔에서 몸을 녹여야 했다. 다행히 슬로베니아의 어느 마을을 지나다 작은 호텔을 잡을 수 있었다. 30유로의 저렴한 비용에 주인의 배려로 사우나까지 딸린 방에서 일박했다.
슬로베니아는 여러 면에서 이탈리아와 달랐다. 농업보다 축산업이 우세해 곳곳에 넓은 목초지가 있었다. 마을은 단정하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사는 모습이 간소하고 소박하며 산과 강은 깨끗했다. 유럽에서도 가장 친환경적인 국가라는 명성이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농가도 이탈리아와 많이 달랐다. 지붕의 경사가 급하고 높이가 높다란 것을 봤을 때 우기에 강수량이 많음을 짐작케 했다.
인구밀도가 낮고 삼림이 무성해 농가 대부분은 연료로 장작을 사용했다. 농가마다 헛간이나 처마 밑에 높이 쌓은 장작더미가 있었다. 저녁이 되어 류블라냐에 도착할 수 있음에도 우리는 텐트를 치기 위해 근교 마을에 머물기로 했다. 시내로 들어갈 경우 야영이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선술집을 운영하는 아주머니의 배려로 헛간에 텐트를 칠 수 있었다.
류블라냐는 정숙하고 한산하며 정돈된 도시였다. 건물은 중세와 현대가 어우러져 자연스러웠다. 뒤에는 높은 언덕과 그것을 둘러싼 성곽이 도시 전체를 굽어보고 있었다. 카페에는 젊은이들이 모여 차나 맥주를 즐기고, 중년들은 신문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행동은 정중했으며 표정은 신중하면서도 유쾌했다. 다가가 뭔가를 물어볼 때마다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우리가 자전거로 로마에서 출발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You are great!”라고 칭찬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시골로 갈수록 옛 기록이 살아 있는 유적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과거 십자군의 영웅담이 새겨진 비석, 이슬람의 침략으로부터 성당을 지킨 전사들의 얘기를 빼곡히 적은 시골성당의 기념비, 농민들이 일어나 외적을 물리친 흔적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유명한 관광지보다 시골이 더 정답고 풍성한 얘깃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로 가는 길은 조그만 지방도로였다. 점점 더 고도를 올려 산으로 꼬불꼬불한 길이 이어졌다. 숲은 어둡고 깊었으며 길은 그 가운데로 달렸다. 드문드문 마을이 있었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사람을 보기 힘들었다. 마을마다 그 중심에는 성당이 있었다. 성당은 겉으로 보기에도 오래된 건물이었으며 저마다 다른 특색을 갖추고 있었다.
시골 아낙에게 길을 물어보다가 수다를 떨면서 수분을 허비하기도 했고, 제법 긴 오르막 산길을 만나면 고갯마루에서 한숨 돌리기도 했다. 흙빛과 풀색의 대비가 뚜렷한 목초지에서는 햇빛이 비치기만을 기다리기도 했으며, 작은 산촌 입구에서는 헛간에 매달린 옥수수와 옛 건물을 살펴보며 중세 이곳 사람들이 살던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긴 산악구간이 끝나자 이내 평원지대로 들어섰다. 슬로베니아의 서부도시 세브니카(Sevnica)에서 크로아티아와 국경을 접한 도시인 도보바(Dobova)까지는 평원이었다. 다정한 물길을 품은 마을은 오래된 성당을 안은 채 평화로웠다. 노인들은 창문에 기댄 채 독서를 하고 농부들은 경사진 밭에서 거름을 펴기도 했다. 소도시에서 다음 소도시로 이어진 거리가 짧았는데 우리나라 작은 읍이나 면소재지 크기에 불과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기도 했다.
사람들은 인심 좋고 모두 근면했다. 잘 다듬어진 농로를 따라 마을로 들어가면 어느 곳이라 해도 잠자고 먹을 걱정 없었다. 어느 마을에서는 아주 작고 예쁜 성당을 만났다. 사람의 정신을 압도하는 큰 도시의 엄청난 성당과 분명 차이가 있었다. 인간이 신에게 다가갈 때 사실 주변 환경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크로아티아 입국
국경 도시 도보바에 도착했다. 나는 자전거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국경을 넘어 자그레브(Zagreb)로 갈 수 있는지 수없이 물어봤다. 이곳 사람들의 대답은 모두 “Yes!”였다. 그러나 국경 체크포인트에서 실망하고 말았다. 우리는 국경 검문소에 있는 크로아티아 경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계속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 국경도 아무런 제재 없이 통과했으므로 여기도 그와 같을 거라 생각하고 왔다. 그들은 계속 머리만 가로저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유럽연합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런 지역 국경선을 넘을 수 없다고 한다. 정해진 검문소를 통해서만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결국 도보바로 돌아가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자그레브로 갈 수 있었다. 기차 안에서 크로아티아 보안경찰들이 여권에 입경 스탬프를 찍는 것으로 마침내 크로아티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자그레브에는 저녁 늦게 도착했다. 숙소를 찾다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유스호스텔을 찾을 수 있었다. 한 사람당 1만 원 정도만 있으면 숙박을 해결할 수 있는 일종의 게스트하우스였다. 최소한의 경비로 여행하는 우리 부부에겐 정말 운이 좋았다.
정해진 기간 안에 그리스까지 돌아보기 위해 우리는 차로 마케도니아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마케도니아에서 그리스 테살로니키(Tesaloniki)로 가서 거기서부터 자전거로 아테네까지 가기로 했다. 원래의 계획을 수정한 것이다. 이런 곳에서 기차보다는 때로 버스가 이동하기 편한 교통수단이라는 걸 경험으로 체득한 나는 지체 없이 하루에 한 번 운행하는 자그레브에서 마케도니아의 스콥제(Scopje)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했다. 표를 예매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있어 하루 더 자그레브에서 머물러야 했는데 덕분에 자그레브의 명소를 자세히 구경할 수 있었다.
자그레브의 문양과 빨강, 파랑, 흰색의 타일로 지붕을 장식한 성 마르코 성당에 들렀다가 거리악사의 연주에 함께 흥을 내보기도 했다. 우리네 광장시장 같은 자그레브의 시장에 들러 풍물을 관람하며 여기 사람들의 분위기에 휩쓸리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러다가 지루하면 광장의 노천카페에 들러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했다. 슬로베니아 사람들보다는 여러 면에서 훨씬 더 역동적이고 낭만적이고 힘이 넘쳤다.
버스는 저녁 늦게 자그레브를 출발해 다음날 아침에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콥제에 도착했다. 마케도니아 하면 알렉산더 대제가 떠오르겠지만 유고연방 시절부터 현재의 독립 국가를 이루기까지 순탄하지 않은 역정을 겪은 나라다. 도시는 아직 건설 중이었으며 특이할 만한 것은 터키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스의 테살로니키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한 후 하루 정도 시간이 남아 둘러볼 기회가 생겼다. 광장의 가장 중요한 곳에 세워진 것은 역시 알렉산더 대제의 동상이었다. 기원전 4세기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의해 망했다. 이후 오늘날까지 민족의 뿌리와 명맥을 유지하다 유고연방이 해체되면서 독립국가로 태어났다. 물론 마케도니아와 알렉산더에 대한 정체성 논의가 인접국 그리스와 끊이지 않고 있지만, 이들은 분명 자신들이 알렉산더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옛 성터인 트브르디나 칼레 성은 복구 작업 중이었다. 외곽에는 터키인들의 거주지역이 있어 하나의 도시에 두 개의 종교와 문화가 혼재해 있었다. 우연히 찾은 터키인 중심의 이슬람권역은 스콥제에 간 사람이라면 꼭 한 번 들러보라고 권하고 싶은 곳이었다. 간결하고 단정한 모스크와 이슬람 문화 특유의 색과 물건들로 가득한 시장과 음식점이 있었다.
스콥제를 출발해 마침내 이번 자전거여행의 마지막 나라인 그리스의 테살로니키에 도착했다. 싸구려 호텔에서 하루를 묵은 후 아침 일찍 큰 도시인 라리사(Larisa)와 다음 도시인 라미아(Lamia), 그리고 델포이(Delfoi)를 향해 자전거 페달을 돌렸다.
출발부터 길 찾기는 어려웠다. 경찰관 말만 믿고 큰 도로로 들어섰는데 그 도로는 자전거가 다닐 수 없는 고속도로였다. 결국 도로관리원의 친절한 안내로 고속도로에서 나와 에게해를 끼고 라미아로 가는 국도로 들어섰다. 에게해와 인접한 마을은 어느 곳을 향해 카메라 초점을 맞춰도 모두 훌륭한 풍경사진이 될 만큼 깔끔하고 눈부셨다. 지루하리만치 끝없이 펼쳐진 올리브 농원, 능선과 구릉 사이로 뻗어나간 밀밭, 에게해의 푸른 바다 빛과 어울려 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앉아 있는 마을은 그리스 농촌의 전형이었다.
올림포스산 산촌마을에서 즐기는 여유
처음 그리스에 도착해 자전거에 올랐을 때만 해도 대부분 평원지대일 거라고 상상했지만 큰 착각이었다. 점심을 넘기자 길은 점점 오르막으로 변했다. 저녁 빛이 길어질 무렵 흰 눈을 뒤집어 쓴 큰 산 하나가 보였다. 나는 그것이 직감적으로 올림포스산(2,917m)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설마 저 산을 넘거나 그 근처로 가는 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설마는 현실이었다. 카테리니(Katerini)를 지나 라미아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올림포스산을 지나야 했다. 말하자면 긴 산줄기의 고개를 넘어야만 했다. 고개를 넘고서도 고대도시 델포이까지 이어진 산악지역을 통과해야만 했다. 어둡고 눅눅한 그림자가 자전거 앞을 가로막으며 해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오늘 중으로 올림포스산을 넘기는 역부족이었다. 최대한 올림포스산 가까이 가서 야영을 하기로 하고 페달을 밟았다.
그리스 산촌은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처럼 산 아래보다는 산 중간이나 위에 형성되어 있었다. 밀밭과 채소밭, 올리브 농원을 끼고 구불거리는 도로를 달리다 해가 떨어질 즈음 제법 큰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사람의 허락을 얻어 음식점 옆 공터에 텐트를 치려 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우리가 안쓰러운지 바람이 들지 않는 다른 곳에 치라고 권했다.
다음날 일찍 올림포스산을 향했다. 긴 오르막은 에게해와 더불어 사방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길이었다. 이 구간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새 도로가 뚫려 옛길이 된 탓에 무척 한적했다. 청옥을 매단 듯 짙고 깊은 군청색 하늘과 단번에 닿을 듯 수평선과 함께 다가오는 아름다운 에게해, 정상에 흰 눈을 안은 채 장엄히 버티고 있는 올림포스산을 보며 우리는 천천히 올랐다.
고개 정상을 지나 비슷한 고도의 길을 오르내렸다. 깊은 숲 사이로 설산이 보이다가 넓은 경작지와 파스텔 색의 지붕을 덮은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공터에서 옛 성당을 구경하다가 빨래를 너는 아낙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어느 여행자가 올림포스산이 보이는 이런 그리스 산촌의 마을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겠는가. 오직 자전거 여행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길은 올림포스산의 설릉에 근접할 정도로 높이 올라갔다가 내리막을 달렸다. 마트를 찾다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시골의 식당에서 한 끼 해결하기도 했으며, 올리브 열매를 따서 입 안에 넣었다가 너무 떫어 뱉기도 했다. 저녁 늦게 라리사에 도착해 변두리의 한 허름한 호텔에 묵었다. 그동안 누적된 피로로 몸이 무거워 야영은 무리였다. 호텔이란 간판이 의아할 정도로 부족한 게 많은 곳이었지만 주인장의 넉넉한 마음씨와 마케도니아 호텔이라는 이름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아침 일찍 출발했으나 길을 찾지 못했다. 최종 목적지는 라미아와 델포이를 경유해 아테네에 도착하는 것이지만, 정확한 국도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와중에도 우리는 그리스 농촌의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낮은 구릉을 따라 쉴 새 없이 펼쳐지는 올리브 농원은 그리스 농촌의 정해진 룰과 같았다. 바람은 적당했으며 빛은 우리 뒤를 밟으며 주변의 마을과 들판을 온갖 현란한 색으로 변하게 했다.
잊을 수 없는 올리브나무 숲
마치 이름 없는 행성을 달리다가 고향 마을 앞에 선 것 같기도 했다. 정신을 차린 후에는 그리스의 어느 시골이라는 걸 알 정도로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자전거 여행을 오래 하다 보면 이렇듯 문득 무아지경이 찾아오기도 했다. 밀밭이 아득한 곳에서는 길가에서 차 한 잔을 끓여 마시다 포도밭을 손질하던 농부와 눈빛을 나누며 한참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경찰관에게 적발되어 정중히 길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늦은 저녁에 소울피라는 마을에 도착해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해 공사 중인 집 안에 텐트를 치고 하루 묵었다.
소울피에서 라미야까지는 에게해의 분방하고도 정돈된 그림 같은 풍광과 해안의 어촌, 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올리브 농원을 통과하는 길이었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올리브 농원은 처음이었는데 어떤 곳은 산 전체가 올리브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짐작컨대 어느 농원의 올리브나무들은 몇 백 년은 되었음직했다. 한번 농원 안으로 들어가면 길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중간에 메테오라(Meteora)를 들르지 않은 것이 못내 서운했지만 에게해와 더불어 내륙의 올리브 농원을 구경한 것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라미아(Lamia)에서 암피사(Ampisa) 구간은 그리스 여행 중 가장 어렵게 지나온 길이었다. 산악구간인 데다 종일 비를 만나 암피사에 도착해서는 몸이 땀과 물로 범벅이었다. 내리막에서는 차가운 빗물에 온 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춥다가 구불대는 오르막을 오를 때는 너무 더워 입고 있는 옷이 거추장스러울 정도였다.
우리를 보는 현지인들은 우호적이었다. 어떤 사람은 차를 멈추고 식수를 주었으며, 젊은 아가씨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쿠키를 주기도 했다. 다행히 암피사의 호텔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다음날 편안하게 고대 유적의 보고인 폴리스 델포이로 출발할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델포이는 코린트만을 굽어보는 파르나소스(Parnassos)산의 언덕에 있었다. 그리 넓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테네와 더불어 유럽 문명의 출발지라는 점에서 이번 여행 중 가장 깊은 느낌을 얻었다. 세상의 중심인 옴파로스를 내려다 본 채 양 손으로 하늘을 보듬은 듯 당당한 아폴론 신전과 맨 뒤쪽 꼭대기에서도 바닥에 떨어뜨린 동전 소리가 명확히 들릴 정도로 잘 설계된 공연장, 로마의 황제도 와서 경기를 구경했다는 경기장에 이르기까지 눈을 쉽게 떼지 못할 정도였다. 놀라운 것은 산의 급경사에 도시국가를 세웠다는 점이다.
옛 것이 새롭게 보이는 것은 유물에 대한 향수만은 아니다. 지나간 것에 대한 사유가 미래를 알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도 아니다. 정확히 설명하기 힘든 시간에 대한 혼란과 심장의 두근거림, 그것이 끝난 뒤 제자리로 오는 고요함 때문이 아닐까?
최종 목적지인 아테네에 도착해 옛 유적들을 둘러본 것은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엄중한 계기였다. 자전거 여행이야말로 여러 형태의 여행 중 추천할 만한 방법 중 하나다. 물론 시간적 여유와 인내심과 체력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들은 의지만 세운다면 얼마든지 연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