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왕국, 그 3천년의 산책
국내최고 고인돌 밀집지대 고창
고조선시대와 겹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은 고인돌이다. 한반도 일대에 분포하는 약 3만기의 고인돌은 전세계 고인돌의 40%에 이른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이자 우리 고대사의 미스터리를 숨긴 고인돌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세계최고의 고인돌 밀집지대, 고창으로 간다
하필 왜 여기일까. 가랑비가 추적대는 들판을 나는 감탄과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며 걷고 있다. 눈앞으로 낮게 펼쳐진 야산 자락에는 거뭇거뭇한 바위들이 듬성듬성 그러나 분명한 의도의 질서를 가지고 분포한다. 그냥 바위가 아니라 옛사람들의 무덤인 고인돌이다.
고창은 요즘 MTB파크로 동호인들에게 꽤 알려졌지만, 고고학적으로는 세계적인 유적의 보고다. 이곳 죽림리 일대 성틀봉(151m) 기슭에는 고창천을 따라 길이 1.8㎞ 내에 무려 442기의 고인돌이 모여 있다. 이 때문에 고창 고인돌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고창이 국내최고의 고인돌 밀집지대라면, 한반도는 세계최고의 고인돌 밀집지대다. 곧 고창 고인돌은 단일지역으로는 세계최고의 밀도를 자랑하는 고인돌 군집지다. 한반도에는 전세계 고인돌의 40%인 약 3만기가 몰려 있는데, 이 땅에 고인돌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도대체 뭘까. 고인돌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고인 돌? 古人 돌?
고인돌은 ‘고여 놓은 돌’이라는 뜻이다. 흔히들 ‘고인(古人) 돌’로 착각하는데, 그냥 쉬운 우리말이다. 한자어로는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하며 역시 ‘고여 놓은 돌무덤’이란 뜻이다. 서구에서는 돌멘(Dolmen)이라고 하며 세계 도처에 남아 있는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이다.
대체로 시신을 매장한 묘지 혹은 의례를 위한 제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세계적으로 한반도에 가장 많이 분포한다. 중국도 한반도와 가까운 요동반도와 만주 남부 지역에 분포하고, 일본 역시 한반도와 지척인 규슈에서 발견된다.
한반도 고인돌의 조성 시기는 기원전 10세기~기원전 2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청동검, 화살촉 등 대부분 청동기시대의 상징물로, 역사적으로는 고조선시대와 정확히 겹친다. 고인돌의 분포도를 보면 고조선의 강역과도 일치한다. 한마디로 동아시아의 고인돌은 초기 역사시대의 대표 유물인 것이다. 중국 요동반도와 일본 규슈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은 선조들의 이동경로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땅에 고인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그리고 그 고인돌이 중앙아시아를 넘어 유럽에도 분포한다는 것은 고조선의 세력 혹은 문화역량이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환단고기’ 류의 일견 황당한 기록에도 일말의 신빙성을 주는 것이다.
세계 최고의 고인돌 밀집지
고인돌을 많이 봐왔지만 이런 곳은 처음이다. 산기슭에 널려 있는 바위가 모두 고인돌이다. 얼핏 보면 자연석 같은데 다가서면 어김없이 남방식 혹은 개석식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형태에 따라 탁자 모양의 북방식(탁자식)과 작은 굄돌을 사용한 남방식(바둑판식), 굄돌이 아예 없는 개석식으로 나뉜다. 그런데 여기 고창에는 모든 형식이 다 모여 있다. 고인돌의 전형적인 형태로 알려진 북방식 탁자 형태는 이곳이 남방한계선이다.
잘 단장된 고인돌 지대는 생태공원처럼 보인다. 비 때문에 관광객마저 사라진 고인돌 사이를 조용히 거닌다. 요약하자면 고인돌은 가장 간단하면서 튼튼한 무덤이다. 특이한 형태로 무덤을 쉽게 알아볼 수 있고, 또 무거운 바위로 뒤덮었으니 사람이건 짐승이건 시신을 훼손할 수 없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노역이 필요했겠지만 가장 단단하고 무거운 물질인 바위를 활용한 점에서 제일 안전한 분묘 형태 아니었을까. 직관적으로는 짐승이나 적으로부터 시신을 지키는 것이 고인돌의 최초 목적이 아니었나 싶다. 강력한 철기가 보급되면서 고인돌은 사라지고 매장묘가 등장하는데, 인구와 무력의 증대로 방어적인 고인돌을 더 이상 축조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잦은 전쟁으로 생계가 급박해지면서 죽은 사람을 위해 너무 많은 공역을 들일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고인돌을 따라 나 있는 산책로는 숲길을 거쳐 한동안 이어진다. 왕복하면 거의 4㎞를 걸어야 하는 길이다. 의도적으로 줄을 맞추었고, 돌을 캐낸 채석장도 산 중턱에 남아 있다. 나무 쐐기를 이용해 돌을 절단했다지만 실로 엄청난 공역이었을 것이다. 잘라낸 다음에는 또 옮겨야 한다. 어떤 고인돌은 네모반듯해서 일일이 다듬은 흔적도 보인다. 매장자의 지위나 살아남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따라 축조에 들인 정성은 달랐을 것이다. 지극히 존경하거나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감내하는 노역이었으리라. 2~3천 년 전 사람들의 감성과 정서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음을 짐작한다. 어쩌면 노역의 강도를 보건대, 더욱 처절하고 끈끈하지 않았을까.
들판 건너 맞은편 도산리에는 완벽한 탁자식 고인돌이 남아 있다. 죽림리와 도산리 일대의 고인돌을 다 합하면 447기에 달한다. 좁은 지역에 이 정도로 고인돌이 많다는 것은 지배자의 무덤이 아니라 누구나 묻히는 무덤이었음을 말해준다. 또 근처에 이들이 모여 살던 큰 마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장소는 고인돌군 맞은편의 도산리, 상갑리 일대의 구릉지였을 것이다. 그래야 고창천의 범람을 피할 수 있으면서 물을 활용하기 쉬웠을 것이다. 거주지와 분묘를 격리시키는 와중에도 도산리의 구릉지 높은 곳에 자리한 탁자식 고인돌은 존경받는 지배자의 무덤이 분명해 보인다.
고창 고인들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였을까. 만주를 거쳐 한반도 북쪽에 있던 고조선의 행정력이 이 먼 곳까지 미쳤을까. 고창뿐 아니라 화순, 나주 등 호남 남부 지방에 고인돌이 특히 많이 분포한다(전남에만 약 2만기). 이 지역에는 삼국시대인 5세기까지도 백제와 독립적인 지방권력이 존재했다. 주로 한반도 중북부에서 이뤄지던 주류세력과 무관하게 이곳에는 오랫동안 소규모 자치권력이 분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고인돌과 청동기 문화를 가진 것을 보면 고조선의 정변을 피해 남하한 유민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 중 일부는 바다를 건너 규슈로 가서 원주민을 정복하고 농경을 전하면서 일본의 야요이문화(彌生文化, 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를 열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고대의 전남지역은 6·25 때의 부산처럼 고조선 유민들이 집결해서 한반도 동남부와 일본으로 다시 확산해 나가는 거점이었던 셈이다.
묘지의 산책
묘지를 산책하면 철학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살아 있는 나와 불과 얼마의 시간차로 이처럼 천양지차의 존재 형태로 격리되어 있음이 당혹과 공포, 그러나 안온한 사색의 깊이에서 실감된다. 그 묘지가 2~3천 년 전의 고분이라면 그 시간만큼의 역사적 축적이 한결 거대한 무게감으로 머리와 가슴을 에워싼다.
고인돌 사이를 산책하며, 날카롭게 마무리된 어느 바위 모서리를 쓰다듬어 본다. 나의 부드러운 손길은 예리한 모서리를 휘감을 뿐이지만, 2천 년 전 누군가는 거친 손에 피가 맺히도록 이 모서리를 갈고 깎아냈을 것이다.
죽음의 장소, 일견 음울하고 괴기스러워 보이지만 장구한 세월은 묘지마저 해맑은 자연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곳에는 뼛조각 하나 남아 있지 않고 바위는 다시 풍화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래서 고인돌 사잇길 산책은 울적하기보다 향기롭다. 이 바위들을 자르고 운반한 사람들 덕분에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지독한 인연의 강고함도 일별한다. 나는 혼자가 아니고, 이미 죽은 자를 위해 이런 큰 무덤을 만들 정도로 인간의 삶은 가치 있음도 재확인한다.
마지막으로 산을 넘어 동양최대라는 운곡 고인돌을 찾아나섰다. 저수지 위쪽, 막다른 계곡에 자리한 고인돌은 어마어마하다. 고인돌이 맞나 싶을 정도다. 높이 5m, 길이 7m, 무게는 무려 300톤에 달한다. 바닥에 굄돌까지 있는 것을 보면 조금이라도 옮겼거나 들어 올렸다는 얘긴데, 믿을 수가 없다. 지금도 300톤 크레인은 흔치 않다. 이 고인돌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이 외지고 깊은 산속에, 오직 홀로 서 있는 주름지고 늙은 바위는 비범한 영기마저 발산하는 듯하다.
이 거대한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우리는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고인돌의 신비와 마력은 또 영원히 우리를 사로잡고, 수수께끼의 해결을 재촉할 것이다. 물증은 찾지 못하겠지만 심증만으로도 후예들은 상상력의 나래를 펴며 행복해 할 것이다.
찾아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고창IC에서 나와, 우회전 3㎞ 가면 고창고인돌공원이다. 넓은 주차장과 고인돌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여기서 죽림리 고인돌군까지는 700m 가량 걸어가야 한다. 운곡고인돌은 고인돌군 뒤편 언덕을 넘어 오베이골 탐방로를 따라 3.5㎞ 들어간, 운곡서원 동쪽 골짜기 초입에 있다. 도산리 탁자식 고인돌을 보려면 고인돌박물관 입구 좁은 농로로 1㎞ 정도 가면 된다.
글·사진 김병훈(자전거생활 발행인)
제공 자전거생활
출처 바이크조선
발행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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