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과 번영 러 歷史의 현장… 대륙은 생물이다"
뉴라시아 자전거 원정대는 모스크바 성 바실리 성당을 뒤로하고 러시아 제3 도시 니즈니노브고로드를 거쳐 13일 볼가강 가에 있는 타타르 자치공화국 수도 카잔에 왔다. 허리를 하얗게 드러낸 자작나무가 끝 모르게 이어졌고 광활한 해바라기 밭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볼가강의 진주'라는 별명 그대로 카잔은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재정 자립도도 높다고 한다. 그러나 유럽과 아시아가 맞붙는 경계에서 카잔이 아픔을 겪어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타타르'는 13~16세기 러시아를 지배했던 몽골족 후예와 튀르크족을 아우르는 말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오랫동안 '타타르의 멍에'를 말하며 치를 떨곤 했다. 몽골의 무자비한 지배가 몰고 온 공포와 학살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칭기즈칸은 병사들에게 "동정(同情)은 후회의 씨앗"이라고 가르쳤다. 카잔은 그런 몽골 지배의 전진기지였다.
러시아 이반 대제는 16세기 몽골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카잔을 정복하고 위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을 지어 성모 마리아에게 바쳤다. 크렘린에 있는 성 바실리 성당이다.
그는 성당을 지은 건축가들을 불러 크게 칭찬하고 뒤로는 부하를 시켜 건축가들의 눈을 못 쓰게 만들었다. 바실리 성당처럼 아름다운 건물을 더 이상 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카잔은 러시아에서 이슬람세(勢)가 아주 강한 곳 중 하나다. 동물의 왕국과는 달리 인간의 초원에는 절대 왕자가 없다는 걸 유라시아 대륙을 지나오며 실감한다.
니즈니노브고로드는 '어머니'를 쓴 러시아 문호 막심 고리키의 고향이기도 하다. 120년 전 이곳을 지나간 한국인이 있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을 축하하러 왔던 조선의 특명전권공사 민영환이었다. 19세기 말 니즈니노브고로드는 '러시아의 돈주머니'라는 말을 들을 만큼 번영을 누렸다. 이곳에서 해마다 열리는 박람회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산업 박람회였다. 민영환은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투르크 등지에서 온 온갖 신기한 특산품과 이것들이 거래되는 새로운 방식을 보며 "눈이 어지러워 응대할 겨를이 없다"고 일기에 썼다. 그는 박람회장에서 조선에선 듣도 보도 못했던 열기구를 타보기도 했다. 그러곤 "풍선에 바람을 넣은 가벼운 둥근 물체에 올라타서 하늘을 배회하니 날개를 단 신선 같았다"고 했다.
당시 조선의 왕은 자신의 궁(宮) 안에서 일인(日人) 폭도 손에 왕비를 잃고 러시아 공사관에 피난 가 있었다. 조정이 민영환을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보낸 데는 러시아 힘을 빌려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민영환이 내놓은 차관 제공과 왕실 수비병 파견 등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힘을 바탕으로 이익이 거래되는 국제 관계에서 약소국 사신(使臣)의 목소리는 들어설 곳이 없었다. 민영환은 귀국 후 세계 일주에서 얻은 근대 국가 경영에 대한 안목을 바탕으로 개혁 보고서를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1905년 을사늑약 후 자결하면서 쓴 유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나라의 수치가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백성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 모두 진멸(盡滅)당하려 하는도다."
니즈니노브고로드는 러시아 혁명 후 고리키 시(市)로 불리다가 공산주의 붕괴로 소련이 해체된 후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민영환이 '북쪽 넓은 들에 사방 십리'였다던 니즈니노브고로드의 박람회장은 대부분 아파트 단지와 주택가가 됐다. 지나가는 주민들도 이곳에 옛날 무엇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근처엔 거대한 호텔이 들어섰다. 20세기 초 박람회장 본관으로 지어졌다는 웅장한 건물 하나가 남아 은행·상가 등으로 쓰이며 희미한 자취를 이어가고 있었다.
민영환이 걸었을 니즈니노브고로드 거리를 뉴라시아 자전거 원정대원들은 우리 번호판을 단 한국산 자동차의 선도를 받으며 달렸다. 그들이 입고 있는 유니폼에 태극기가 선명하다. 러시아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서도 한국산 자동차가 꽤 많이 달리고 있다. 민영환이 이 모습을 보았으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러시아에 갔을 때 민영환은 상투 틀고 갓 쓰고 도포를 입고 있었다. 대륙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걸 원정대원들은 매일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확인하고 있다. 문제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대륙 역사의 무대 위에 누가 어떻게 올라가 주인공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