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카라코룸하이웨이1,000km 자전거 여행 (7)] 이들의 삶, 심장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글·사진 이남석 경복고교 교사 | 2012.09.28 10:37
파수에서 소스트로 가는 명상의 길
새벽 기운이 채 가시기 전에 밖으로 나왔다. 마치 어느 행성 표면에 와 있는 것 같다. 어제 낮에 봤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내가 잤던 방이 어디 다른 위성으로 날아갔단 말인가? 사방을 둘러싼 날카로운 암봉을 품은 능선은 갈색과 검붉은색의 조화로움이 한층 두드러져 지구상에 존재하는 토양의 색깔이 아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짙어 군청색 바다를 연상시킬 정도였고, 멀리 있는 설산은 장엄함을 넘어 신비롭기까지 했다. 밖으로 드러난 살이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온이 뚝 떨어져 있었다.
오늘 부지런히 달리면 마침내 국경도시 소스트에 도착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흥분되었다. 이제 내일이면 어떻게든 출국심사를 마치고 파키스탄을 벗어나 중국의 파미르고원으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이른 새벽인지라 산맥의 높은 봉우리에는 아직 빛의 기운이 없는 걸로 봐서 해가 떠오르지 않았지만 오히려 은은한 빛으로 채색된 산맥과 봉우리들이 더 잘 어울리고 아름다웠다. 페달에 발을 올려놓자 자전거는 마침내 앞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윤즈밸리로 이어지는 바투라산군은 어제 낮에 봤을 때는 그저 평범한 설산에 불과했지만 새벽에 보니 감탄부호가 모자랄 정도로 바라보는 마음을 뒤흔들었다. 자전거에서 내린 후 높은 바위에 올라가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발토르빙하를 따라 우뚝 솟은 K2나 가셔브룸을 연상시켰다.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아름다움과 장대함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끝이 날카로운 쐐기모양을 한 산 봉우리는 해가 떠 오르면서 시시각각 색이 변했다. 그러니 어찌 그를 위한 노래 한 곡조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을 이름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병에 물을 채우기 위해 들렀다가 아이들을 만났다. 낯선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자 주변에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어디를 가나 아이들이 가장 소중한 보물 아니겠는가. 정성스럽게 내 표현을 하고 사진을 찍어 보여주었다. 아이들은 그걸 보고 신기해하고 한 번 더 찍자고 난리였다. 물병을 꺼내 어디 가서 물을 얻을까 우왕좌왕 했다. 바로 그때 집에서 나와 물끄러미 이 광경을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내가 뭘 원하는지를 단박에 알았는지 물병에 물을 가득 채워주었다. 그뿐이랴?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난과 꿀, 버터와 짜이까지 내왔다.
내가 손을 흔들면 여인들도 겸연쩍은 듯 화답
지구상의 생명체가 가장 많이 공유하는 것은 무엇일까. 해와 달, 그리고 밤에 찾아오는 손님인 별이 아닐까? 그러나 이보다 더 많이 공유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다르마(Dharma)가 아닐까 한다. 태어나고 성장하며 끝내 죽는 생명의 공연장에서 인(因)과 연(緣)으로 묶여가는 극의 진행이야말로 그 자체가 다르마라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저마다의 시나리오인 것이다.
거의 아무것도 그려 넣지 않은 종이처럼 순수한 아이들의 생각 또한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내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내가 손과 눈으로 얘기해도 금방 알아듣고 이리 가고 저리로 뛰고 웃다가 때로 가까이 와서 내 옷을 만져보기도 했다.
나는 설산을 바라보며 여러 생각들을 했다. 긴장하여 날카로워진 편협의 시각과 이원의 분별심을 부수고 하나의 넓은 땅을 고루 비추는 달빛의 중심으로 내 몸을 던져보았다. 주기적으로 자전거 체인이 스프라켓에 부딪히는 소리가 때로는 연주소리처럼 들려 그것만으로도 지루하지 않았다.
급류는 더욱 날카로운 소리를 내고 고도는 점점 높아진다. 계곡물의 양이 줄어들고 주변의 경작지도 좁아져 마을은 물가 주변으로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카리마바드나 길기트에서 봤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이 지역을 여행하면서 만약 길을 잃거나 민가를 찾아야 할 때는 그저 설산 주변으로 가면 된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 물이 있고 또 그 물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고원에서 초지를 찾아다니며 유목을 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물가에 정착해 경작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짓는다.
시간이 오전의 정점으로 치닫자 솥에서 물이 끓듯 새벽의 서늘했던 기온은 사라지고 참기 힘든 더위가 시작되었다. 자전거는 끊임없이 오르고 내려가는 것을 반복하면서 마을과 고개, 깊은 계곡과 널따란 구릉을 연속적으로 지났다. 국경인 소스트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아직 보이지 않으니 이러다가 오늘 저녁까지 도착하지 못하고 또 야영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불안하기도 했다.
어른들은 대부분 뜨거운 날씨 탓인지 거의 모두 나무그늘 밑이나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애들은 애들인지라 불같은 햇빛 아래에서도 길거리나 밭둑에 나와 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우르르 다가왔다. 내가 어떻게 그들과 말로써 대화할 수 있을까. 그저 표정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바람으로 닦은 자리에 창공은 드높고 빛으로 씻은 곳에는 설산이 솟아 있다. 농가 울타리 주변으로는 소박한 꽃들이 줄기를 올린 채 피었다. 멀리 밭에서 일하는 여인들은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객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낮에 밭에 나와 일하는 사람들은 여인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손을 흔들면 그들은 겸연쩍은 듯 손 흔들어 화답했다.
카라코룸하이웨이 상의 제법 큰 마을이나 작은 도시들은 이따금 관광객들이 들르니까 나 같은 여행자가 신기하지 않겠지만 조그만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자전거 여행자가 신기한 구경거리인 셈이었다. 비록 그들과의 만남이 극히 제한된 짧은 시간에 눈길을 마주치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살구나 물 한 모금을 얻어먹는 정도였지만 내게 준 느낌은 오래도록 지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사막의 오아시스와 여기 고원의 가장자리 마을을 덮고 있는 대부분 수종은 백양나무다. 우리가 옛날 논두렁이나 밭둑에서 많이 봤던 미루나무와 비슷하다. 이곳에서 백양나무는 땅 속에 수분을 저장하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재목으로부터 시작해서 악기나 공예품에 이르기까지 나무를 필요로 하는 모든 곳에 사용된다.
소스트에 가까워지는지 산세가 조금씩 험해지고 가깝게 느껴졌다. 높은 하늘만큼이나 높이 걸려 있는 것 같은 구름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 몸을 가릴 그늘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행히 높은 바위절벽 밑을 통과할 즈음에서야 그늘에 몸을 의탁해 잠시 쉴 수 있었다.
육체야 힘들면 어디든지 던져놓고 숨만 고르면 편안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마음이 아프다면 참으로 이것은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만약 그가 속으로만 앓는다면 종내는 가슴에 병이 되어 백약이 무효한 상태가 될 것이다. 먼 산만 바라봐도 뭉클한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까이 흐르는 물과 백양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만 봐도 지루하지 않고 마음속에 담아버리니 이 또한 병이 아니고 뭐겠는가. 카라코룸의 거대한 모습에 백약이 아무 쓸모없게 되었다.
얼마쯤 가다가 평지가 나타나고 길가에 조그만 마을이 나타났다. 그런데 저쪽에서 누군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뜨였다. 곧 그가 경찰관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끼리 만났으니 먼저 인사부터 나누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는가?
파키스탄 모든 도로의 길목에는 경찰 초소가 있으며 굳이 초소가 아니더라도 도로를 끼고 있는 대부분의 마을 입구에는 경찰들이 총을 들고 순찰을 돈다. 뭐 어느 나라든, 국민들이 경찰을 좋아하든 아니면 그 반대든 그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들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더구나 나는 이곳에서 경찰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고마움이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두 경찰관은 나처럼 자전거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면서 시간이 있다면 어디 식사할 곳을 알려주겠다고 했으나 내가 사양했다. 갈 길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곳에 가니 가족들이 살구나무 밑에서 살구를 수확하고 있었다. 내가 우두커니 서서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살구를 따고 있는 가족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자 그중 가장 나이 어린 남자아이가 그릇에 살구를 담아가지고 내게로 다가왔다. 고도가 낮은 지역의 살구들은 이미 수확을 끝냈는데 이 지역은 고도가 높다 보니 이제 살구가 익어 따고 있는 중이었다. 함께 살구를 따고 있던 어머니가 본인이 직접 나그네에게 오기 어려우니 바로 옆에서 함께 따고 있던 아들을 시켜 내게 살구를 보낸 것이다.
나는 날타르와 라카포쉬 근처에서 살구를 그대로 주워 먹다 탈이 난 상태였다. 물론 설사는 멈추었지만 그래도 살구를 그냥 먹는 게 두려워 그 맛 좋은 살구를 포기한 채 여행 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내게 살구를 대접하는 주인의 호의를 어찌 저버릴 수 있겠는가. 나는 조심스럽게 소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살구를 받아 배낭에 넣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던 소녀
조금 후에는 바로 옆에서 함께 살구를 따던 우리로 말하자면 고등학교 학생인 소녀가 왔는데 이슬람 복장을 하고 있으면서도 무척이나 개방적이고 명랑했으며 영어도 꽤 잘 했다. 미래에 무엇이 되고 싶은가 물어보니 그녀는 컴퓨터 관련 학과에 진학해서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다고 했다. 참으로 이런 산골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컴퓨터를 접할 수 있는 곳은 오직 학교뿐인데도 그녀는 그것으로 꿈을 키우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오직 일신을 위해, 그리고 대학을 가기 위해 밤낮으로 국어, 영어, 수학 세 과목에만 몰두하고 있는 우리나라 여학생들을 떠올려봤다. 세상에 나와 걸음마를 하는 순간부터 조기 영어교육의 광풍에 휘말려 그 좋은 우리말은 뒷전으로 팽개치고 영어 학원으로, 수학 학원으로 끌려 다니다가 마침내 고등학교에 와서는 극에 이르니 어디 그런 학생들로부터 이런 소녀와 같은 순박함과 발랄함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도 중요하지. 참으로 아름답고 수려한 자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자라는 그대는 행복하다. 다음에 커서 만약 기회가 닿는다면 그대가 자라난 이곳의 사람들과 자연을 잘 담은 문학작품 하나를 써라. 아마도 최고의 작품이 될 것이다.”
그녀는 내 말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만큼 가니 이번에는 저만치서 어른과 아이들이 어울린 한 가족이 함께 밀을 베고 있었다. 자전거를 길 옆에 세워놓고 여기 사람들은 어떤 도구로 어떻게 밀을 수확하는지 보러 갔다. 역시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우르르 몰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힘들고 무료한 밀 베기 작업만 하다가 나를 보고는 이참에 잘 됐다 싶어 그걸 핑계로 달려온 것이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가 어릴 때 밀을 베던 낫은 왜낫이라고 하여 날이 얇은 낫이었다. 그 낫은 주로 벼나 꼴을 벨 때 사용하는 낫이었다. 이곳은 그런 낫이 아닌 바로 우리가 나무할 때 쓰던 조선낫이라고 부르는 약간 둥그스름하고 뭉툭한 낫을 사용하고 있었다. 베어낸 보리를 차곡차곡 쌓아놓으면서 즐겁게 일하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 어깨를 누르던 쓸데없는 근심 하나가 슬그머니 달아났다.
산맥을 통과한 빛은 땅에 떨어져 깨지고 흙은 자전거 바퀴를 따라 기묘한 음을 낸다. 고개를 품은 능선은 멀리 설산을 껴안고 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를 상기해 보건데 아침 일찍 산 그림자로 시간을 가늠하며 등교했다가 빛이 반대로 길게 누울 때 하교했다.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그 시절 걷던 길과 지금 달리고 있는 카라코룸하이웨이가 서로 중첩되어 보였다. 지금은 자전거가 내 동무요 길잡이라면 그때는 등에 멘 책 보따리와 따라오는 그림자가 동무였다. 신기한 것은 그 시절 느꼈던 외로움과 알 듯 모를 듯한 공허함과 쓸쓸함까지 쏙 빼 닮았으니 이 무슨 조화 속인가. 아! 문득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허망한 생각까지 했었건만 이제 다시 그 기분을 느끼니 이보다 행복한 순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차로 이동하면서 여행을 하다보면 대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서 하차하게 된다. 따라서 그곳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관광객들과 접하게 되니 관광객들이 무엇을 요구하며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대충은 안다. 하지만 자전거 여행을 하는 동안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외지인들과는 만날 기회가 적은 조그만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볼 때마다 신기해하고 친절했으며 무엇이듯 먼저 주려고 했다.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정서가 아닐까? 어떤 때는 마을에서 몇 년이고 눌러 앉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음이 편안하면 저절로 관대해지며 평상시 품었던 분기도 슬며시 사라진다. 만약 이런 곳에서 산다면 참으로 일 년 이내에 도인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 같았다.
여행자들 얘기 중 가장 듣기 어색한 말은 “어디를 여행하다 보니 그 나라는 우리나라 1960년대처럼 누추하고 못사는 곳이더라”라는 식의 표현이다. 한마디로 이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나는 무지하며 여행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라며 대놓고 얘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여행자는 다양한 주변의 자연적 인위적 환경으로부터 얻은 느낌, 지식, 경험들로 행동과 정신이 다져지기에 그런 표현 역시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발짝 더 앞으로 나가서 생각하면 우리가 그토록 보검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생활 패턴, 습관, 그리고 환경 등은 그들을 판단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행하며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들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그것들과 더불어 익숙하게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내부이며, 필요한 것은 심장 가까이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이든 느낌이든 공유하려고 하다 보면 마침내 보편적 동질성도 발견하게 되고 정신의 기저가 되는 의식의 심연 가까이로 우리의 정서를 댈 수 있는 것이다.
이른 저녁 소스트에 도착했다. 중간에 호수가 생기면서부터 물류의 이동이 줄어들어서 그런지 예전에 왔을 때처럼 거리가 흥청대고 사람들이 붐비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곳은 예부터 파미르 고원을 넘어온 상인들이나 구법승들이 거의 맨 처음 만나는 큰 마을이었다. 계곡과 구릉을 따라서 곳곳에 경작지가 널려 있고 고도도 농사를 짓기에 알맞으니 주변으로부터 풍부한 물산이 몰려들던 곳이다. 그러니 큰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파미르를 관통하는 카라코룸하이웨이가 개통되고 나서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상품들이 통관되고 보관되는 곳으로, 말하자면 파키스탄의 국경도시 중 가장 활발한 국경무역의 중심지인 셈이다. 물론 작년에 커다란 홍수가 있어서 길 대부분이 유실되고 더구나 중간에 호수가 만들어지는 바람에 올해는 좀 분위기가 식었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호수를 우회하는 카라코룸하이웨이를 설계 중이라고 한다.
해가 지기 전 소스트 뒷산에 올라갔다. 그곳에는 중국에서 넘어온 컨테이너들과 트럭들이 머무는 소스트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건설되어 있는 트럭스테이션이 있다. 그곳에 서면 소스트는 물론이고 주변이 다 보이는데, 아찔한 절벽 밑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카라코룸하이웨이와 눈을 품은 높낮이가 서로 다른 암봉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나는 문득 지금껏 품고 있었던 구법승의 얘기가 떠올랐다. 동쪽으로부터 온 구법승이 이곳에 와 날이 저물면 마침내 한 민가의 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하루 머물기를 청하면 그는 흔쾌히 허락하면서 다음과 같이 구법승에게 얘기했을 것이다.
“이처럼 먼 길을 오셨으니 내가 만일 그대를 박대한다면 훗날 이곳에서 우연히 만난 나를 인정머리 없고 야만적인 농사꾼이 있었다고 얘기할 것입니다. 사람의 정이 어디 천 명이 있다면 그들이 모두 똑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곧 선천적으로는 부모로부터 받은 선물이요 후천적이라면 살며 부딪고 얻은 것이 기질로 쌓여 마침내 덩어리를 이루고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 정이라 할 것입니다.
나는 하찮은 농부로서 아주 높은 곳의 수로에서 물을 끌어다가 척박한 농토에 대고 봄에 밀 씨를 뿌려 여름에 수확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갈아 가루를 내어 빵을 구우니 나의 가족들은 언제나 신께, 그리고 더불어 내게 감사해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또 한사람, 바로 생소한 동방의 먼 곳으로부터 인더스로 가고 있는 당신에게도 난 한 덩어리를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설사 당신께서 먹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신의 음성을 전하는 것이라 한다면 참으로 나는 그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경전 한 구절을 염송하게 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면, 더불어 땅을 일구고 씨앗을 뿌려 수확하고 보시하는 것 역시 신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구법승은 농부가 주는 난을 먹고 그날 하룻밤을 농부의 집에서 잤을 것이다. 기쁨이 일어나면 억눌렀을 것이요, 서운한 마음이 발흥했다면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책했을 것이다. 다음날 구법승은 주인에게 인사하고는 발길을 돌려 다음 목적지로 떠났을 것이다. 숙소로 들어와 자리에 누웠으나 다른 날들과는 달리 금방 잠이 오지 않았다. 자전거 상태와 짐을 다시 한 번 점검한 후 잠을 청하니 비로소 눈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