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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탄 식객들의 한반도 해안일주] 한파경보 속 맞바람 뚫고 동해안길 60km 달리기의 쾌감!

글·사진 송철웅 | 2012.03.2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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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묵호~정동진~경포대~주문진~양양

한파는 서울에서부터 우리의 뒤를 살금살금 미행해 온 것이 틀림없다. 집단가출 자전거전국일주 17번째 구간 출발점인 삼척 신남항. 짐칸에 싣기 위해 떼어두었던 자전거 바퀴 하나를 조립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손가락이 곱아 들어온다. 어찌나 지독한 추위인지 이곳이 바닷물이 얼지 않는 부동항인 것이 신기할 정도다.

추암 직전의 해안도로 풍경. 춥지만 화창한 날씨였다. 바다에는 강풍을 피해 묘박한 대형 선박들이 떠있는 것이 보인다.

맹방, 하맹방을 지나고 삼척시가지를 벗어나 작은후진해변을 지나면 동해안의 해변도로는 표정이 바뀐다. 길의 표정 변화를 주도하는 테마는 삼척선 철도. 삼척선은 동해역~삼척역 사이에 부설된 단선철도로 1936년 동해선 건설과정에서 시멘트를 수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12.9km의 기찻길이다.

겨울바다와 그 옆을 지나는 철로….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 울창한 해송 숲 사이로 뻗어 있는 철로 위를 철컥철컥 기차가 달리는 모습에는 아련한 추억을 일깨우는 그 무엇이 있어 집 떠난 자전거 나그네들의 감성을 한없이 자극한다.

바다와 닿아 있는 영동 해안 지방은 약하나마 해양성 기후의 특징을 보이기 때문에 대륙성 기후의 지배를 받는 내륙보다는 덜 추운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온화하며 기온의 연교차와 일교차가 적고, 연중 온도가 높다는 해양성 기후는 교과서에나 있는 얘기였다. 현실은 볼이며 귀가 얼어 떨어질 것 같은 맹추위의 엄습에 자전거에 올라타기도 전에 기가 질린다.

모두들 긴장한 가운데 행장을 단단히 꾸린다. 상의와 하의를 있는 대로 끼어 입어 몸통과 다리는 그런대로 견딜 만했지만 문제는 발. 양말에 신발뿐인 발은 추위에 가장 취약한 부분이어서 발가락이 떨어질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영동지방은 덜 추울 것이라는 막연한 짐작으로 자전거 전용 보온 덧신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천추의 한! 그런 상황에서 강한 북서풍은 설상가상 체감온도를 한없이 끌어내렸다.

삼척 장호항에는 강풍에 조업을 포기한 어선들이 계류장에 가득하고 바다는 들끓는 파도로 삭막했다. 얼었던 몸이 좀체 풀리지 않아 속도를 내지 못하고 1시간 가까이 지지부진하다 근덕면 궁촌리와 부남리 사이의 가파른 고개들을 전력질주로 오르자 비로소 온기가 돈다. 이마에 땀이 배어나며 비로소 신발 속 발가락의 존재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1 강릉 시내 약 4km 못미처 남항진 부근의 병산 솔숲에서의 야영. 이 지역은 건조주의보가 함께 발효되어 있었으므로 혹시 모를 화재에 대비해 물통 3개를 준비한 채 혹한기 야영의 필수품인 핫팩에 넣을 물을 끓이고 있다. 2 주문진항 어시장의 한 상인이 손님들에게 싱싱함을 어필하기 위해 문어를 번쩍 들어 보여주고 있다.

프러포즈실도 있는 삼척선 열차와 나란히 라이딩

통일호가 달리던 삼척선은 승객이 줄어들자 1991년 여객칸을 없애고 화물전용으로 운영되다 2007년 동해역과 삼척역 사이에 추암역, 삼척해변역이 들어서며 강릉~삼척 간 관광용 바다열차로 재탄생했다. 주말을 맞아 겨울바다를 보러 온 가족들과 젊은 커플여행객들이 열차를 타고 가다 철로 옆으로 달리는 우리의 자전거행렬을 보고 손을 흔들어준다.

동해안 해안선을 달리는 바다열차는 동해 삼척지역의 명물로 탑승객들이 바다를 잘 볼 수 있도록 전 좌석을 측면방향으로 배치했고, 창문도 일반열차와 비교해 훨씬 크게 만들었다. 특실과 일반실, 프러포즈실로 구분되는 각 칸마다 분위기와 테마가 다르다.

1호차는 개별좌석으로 넓고 편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고 2호차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커플석으로 부부, 연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둘만의 특별한 시간을 만들고 싶으면 칸막이로 프라이버시를 보장한 프러포즈실을 이용하면 된다. 삼척역에서 삼척해변역, 추암역, 동해역, 묵호역, 정동진역, 강릉역에 도착하는 열차는 연중 운행된다.

철도는 해군 1함대가 있는 동해항에서 내륙 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었다가 감추해변부터 다시 해안으로 근접했고 우리의 자전거 코스도 철도를 따라 이어졌다.

삼척에서 묵호 구간은 대형 항만과 공단, 군사시설로 인해 지금까지 지나온 해안도로에 비하면 살풍경이지만 한섬들목길 같은 명품 오솔길이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한다. 한섬들목길은 동해항을 빠져나와 천곡동 한섬해변에서 묵호 가세마을까지 약 2km 남짓한 짧은 구간이지만 아름다운 해송숲 사이로 난 호젓한 길이 심금을 울린다. 소나무의 우듬지를 스쳐가는 계절풍의 어쿠스틱한 음향과 나뭇가지를 뚫고 들어온 늦겨울 볕이 길 위에 어른어른 몽환적 그림자를 드리웠다.

날씨는 말도 못하게 춥지만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두터워진 햇볕이었다. 바람막이가 있는 양지 바른 곳에서 다리쉼을 할 때면 등짝에 내리쬐는 볕이 따스하다.

어달, 금진의 바닷바람에 식었던 몸이 정동진으로 가는 고갯마루에서 다시 데워진다. 등명, 안인진까지 쾌속으로 달리고 나니 짧은 겨울해는 히말라야인 듯 눈을 하얗게 뒤집어쓴 대관령 뒤로 넘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해가 기울며 기온은 급속도로 떨어진 가운데 나그네들이 객지에서 밤을 맞이할 채비를 해야 할 시간. 어딘가 이 찬바람을 막아줄 만한 야영지를 찾아야 한다.

야영 뒤 캠프의 아침 풍경. 부스스한 모습이 네팔이나 몽골의 원주민 분위기가 난다.

집단가출팀과 인연이 깊은 노스페이스 강릉점의 최기순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적당한 야영지를 묻자 대뜸 “얼어죽겠다는 얘기냐?”는 힐난조의 반문이 날아온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각 강원영동지방에는 강풍경보와 함께 한파경보가 내려진 참이었다. 한파경보란 주의보보다 한 단계 높은 것으로, 아침 최저기온이 전날보다 15℃ 이상 떨어지거나 이틀 이상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15℃를 밑돌 것으로 예상될 때 발효된다. 최기순 선배 역시 대학 산악부 출신으로 야외에서 갖은 상황을 다 겪어본 베테랑이지만 이런 추위에 자전거를 타고 와서 한뎃잠을 자겠다는 우리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 남항진 못미처 병산에서 바람이 불지 않는 솔숲 속에 널찍한 통나무집 조립현장을 발견하고 책임자인 대목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흔쾌히 텐트를 쳐도 좋다고 한다. 그 사이 한달음에 달려온 최기순 선배가 다짜고짜 우리를 차에 태우고 강릉 시내로 내달렸다.

최선배가 우릴 데리고 간 곳은 교동의 식당 <주문진곰치>. 문어숙회, 밀복회, 털게찜 등 행여 너무 알려져 외지인들의 손을 타면 맛이 변할 것을 우려해 강릉 원주민 식도락가들이  쉬쉬하며 먹는다는 귀한 음식들이 줄줄이 나온다. 바닷가 식당답게 싱싱한 해산물이 하루 종일 추위와 대결하며 페달링 한 멤버들의 오감을 자극했다.

삼숙이탕에 응어리진 한기 봄눈 녹듯 스러져

식사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삼숙이 맑은탕이었다. 삼식이, 삼세기 등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가진 삼숙이는 작은 아귀처럼 생긴 생선이다. 곰치와 함께 동해안의 겨울철 생선 중 국물 맛이 깔끔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삼숙이를 대파와 마늘 정도로 부재료를 극도로 절제해 끓여 낸 맑은 탕이 목을 넘어가자 몸 속 깊숙한 곳에 응어리처럼 쌓였던 한기가 단번에 봄눈 녹듯 사라진다.

1 망상해변의 휴식. 백사장 언저리에 설치된 나무 그네에 모여 앉았다. 왼쪽부터 허영만, 이진원, 홍순영. 2 주문진항 후미진 선창가에서 만난 풀빵 노점에서 간식을 먹고 있는 대원들. 추운 날의 라이딩에서 뜨거운 음식은 그 자체로 커다란 위안을 준다.

해안길로만 햇수로 3년째 자전거 여행 중인 집단가출 자전거 식객들로서는 서해부터 남해까지 해산물로 만든 국물을 수없이 먹어봤지만 이날 삼숙이 맑은탕은 곰치, 장어, 성게미역국, 살조개탕과 함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베스트였다. 국물 베스트5의 공통점을 찾자면 양식이 안 되는 자연산 해물을 식재료로 쓴다는 사실인데 삼숙이 역시 양식은커녕 다른 생선을 잡는 그물에 가금씩 얻어걸리는 물고기였다.

저녁을 든든히 먹어 북극의 추위도 견딜 것 같은 기세로 씩씩하게 야영지로 돌아와 보니 역시 춥긴 춥다. 텐트 밑에 솔잎과 함께 목조현장인 덕분에 지천인 톱밥을 두툼하게 깔고 끓인 물을 핫팩에 담아 침낭 안에 집어넣고 그 온기에 의지해 자리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한파 속의 하늘은 너무도 맑아 별들이 그야말로 쏟아질 듯 아름다웠다. 별똥별 하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길게 불꼬리를 남기며 떨어진다.

이튿날, 기온은 어제보다 약간 올랐으나 바람은 더 강해졌다. 경포대를 지나 주문진을 향하는 북행길에서 맞바람은 자전거를 자꾸만 뒤로 밀어댄다. 체온이 떨어질 것을 염려해 평소보다 RPM을 높여 달리지만 정면에서 불어오는 북풍에 페달이 천근만근 무겁다.우리를 괴롭힌 것은 바람만이 아니었다. 백사장을 지날 때마다 바람에 날린 모래가루가 입으로, 코로 마구잡이로 들어와 사막에서 모래폭풍을 만난 것과 진배없던 것이다. 쉴 때마다 모래로 지근거리는 입을 물로 헹궈내야 했고 신발을 벗어 툭툭 털면 모래가 한 줌 가까이 나왔다.

주문진항 선창가의 인적 드문 뒷골목에서 짐수레를 개조해 간이노점으로 꾸민 풀빵가게에서 뜨거운 풀빵으로 간식을 한 뒤 행여 몸이 식을세라 다시 내달린다. 남애, 동산, 기사문 코스는 7번국도가 워낙 바다 쪽으로 붙어 있는 탓에 중간 중간 별 수 없이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국도를 타지 않을 수 없다.

3 추암해변 백사장의 화창한 오후. 한동안 TV의 애국가 배경화면으로 사용됐던 촛대바위는 뒤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4 원포 부근에서 자동차가 빈번히 통행하는 7번국도를 피하려 마을길로 들어섰다가 막다른 골목을 만나 수풀을 헤치고 다시 도로로 탈출 중. 때로 루트파인딩 실패의 대가는 쓰다.

어떡하든 7번국도를 회피하려 애를 쓰다 잔교 부근에서 맞춤한 마을길이 보이길래 옳다싶어 들어섰다가 결국 길을 놓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잡목숲과 철조망을 넘어서 다시 7번국도로 나온 뒤에 다리가 따금따끔해 살펴보니 잡목 사이에 도깨비풀이 있었던 모양인지 바지에 온통 도깨비바늘이 엉망으로 붙어 있다.

투덜거리며 도깨비바늘을 떼어내고 있는데 두 명의 라이더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38휴게소에서 만나 물어보니 두 사람은 서울에서 고속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아침에 강릉에 내려 출발했으며 속초까지 달린 뒤 다시 버스편으로 돌아갈 예정이란다.

우리는 하조대에서 헤어졌다. 두 사람은 7번국도를 택했고 우리는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해변과 7번국도 사이의 비좁은 마을길로 들어서 여정을 이어나갔다.

양양공항 동쪽 소로를 통해 수산항을 돌아 양양읍내에 도착했을 때 우리의 기력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그동안 17개월째 자전거를 타왔으니 어지간히 페달링에 적응이 됐으련만 맞바람을 뚫고 비포장길을 포함한 60km를 달리기에는 날씨가 너무 추웠던 것이다.

이제 양양까지 진출했으니 해안선 일주 종착점인 고성군 명파해변까지 남은 거리는 약 60km. 다음달 라이딩 때는 부디 봄기운이 무르익어 가벼운 옷차림으로 달릴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