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 인도 히말라야 1,000km 자전거 여행 ⑪ 마지막회] 최소한의 삶에서 행복 얻는 유목민들, 그들 속에서 나는 행복했다
글·사진 이남석 서울 성동공고 교사 | 2014.01.21 11:08
여행의 종착지 스리나가르에 닿다
무거운 쇠북소리는 땅 밑으로 가라앉았다. 영적인 분위기의 산맥과 계곡은 쉬지 않고 눈 녹은 물을 평원으로 흘려보내 감동의 큰 덩어리로 가슴에 남았다. 마치 몇 장 남겨놓지 않은 장편소설을 읽어 내려갈 때의 호흡과 같았다. 여행의 끝인 스리나가르를 목전에 두고 나는 고원의 마지막을 통과하고 있었다. 거의 보름을 달려온 길이지만 창공에 매달린 달의 반쪽도 따라잡지 못했다. 마치 부처님 손바닥을 헤맨 손오공처럼 광대한 히말라야의 한쪽 끝에서 놀라고 경이로워하며 한없는 매력에 경도되었을 뿐이었다.
봉우리에 매달린 붉은 바위와 검은 흙은 흰 눈을 안고, 옆으로는 갈기를 세우고 내달리는 이리처럼 사나운 바위 능선이 산맥을 따라 끝없이 이어졌다. 좌측으로는 설산으로부터 달려온 지류들이 하나로 합쳐져 맹렬히 흐르고, 경작지를 덮은 보리와 밀은 가을빛을 닮은 빛에 반사되어 황홀한 아름다움의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설산의 높이가 비교적 낮고 사계로 빙하와 눈 녹은 물이 흘러내려 어디든 초지가 형성되어 있으니 능선과 분지, 협곡과 구릉을 가리지 않고 유목을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곳에 사는 유목민들은 특이하게도 히말라야 동부의 잔스카르 지역에 사는 라다크인과는 얼굴 생김새부터 달랐으며 같은 카슈미르 지역에 사는 무슬림들과 비교해도 다른 점이 많았다. 복장과 생김새로 봤을 때는 파키스탄 훈자나 스카르두, 아스콜리나 탁실라 근처의 산악지역에 흩어져 사는 발티스탄과 비슷했다. 다만 주거 형태가 고정된 가옥이 아니고 대부분 텐트에서 생활했다.
큰 고개를 하나 넘고 가파른 협곡을 벗어나 제법 넓은 평원지대로 들어섰다. 우측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을 껴안은 높은 산봉우리가 이어졌는데, 절벽의 색깔이 마치 빛에 녹아 흘러내린 바위에 백색 분말을 뿌려 놓은 것 같았다. 너무도 기이하고 아름다워 한 번 바라보다보면 몇 분씩 눈을 떼지 못했다.
멀리 한 무리의 양떼가 목동과 함께 거칠고 경사가 급한 언덕으로 오르는 모습을 발견했다. 자전거를 끌고 길을 이탈해 양떼가 있는 곳 가까이 다가가 보니 목동은 100마리도 넘어 보이는 양떼를 몰고 아슬아슬한 급경사를 마치 곡예하듯 올라 봉우리 언저리에 있는 초지로 가고 있었다. 그 밑에는 허름한 텐트가 있는데 유목민이 거주하는 천막이었다. 가까이 가자 우리 나이로 초등학교 6학년쯤 되어 보이는 소년과 어린 아이 한 명이 쪼르르 내게로 달려왔다.
유목민들의 삶에서 깨닫고 배우다
이곳 유목민들은 필요 이상의 많은 양을 키우지 않았다. 초지가 정해져 있고 또한 풀을 먹일 수 있는 양과 기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어서기도 힘든 낮은 천막 안에서 두 아이의 어머니가 그릇을 닦고 있다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젊은 남편은 양을 몰고 나갔으며 아내와 두 아이만 집에 남아 있었다. 절벽에서 흘러내린 파쇄석이 쌓인 곳에는 샘이 있었으며 그 물로 한 가족이 살아가고 있었다. 많이 부족하고 불편해 보였지만 그들은 이미 최소한의 살림도구와 식량으로 이 고원에서 사는 지혜를 터득하고 있었다.
자전거를 돌려 다음 고개를 넘어서니 또 다른 유목민 텐트가 보였다. 입구에는 사나운 개가 묶여 있어 내가 접근하자 흰 이빨을 드러내며 엄청나게 짖었다. 놀라서 뒤로 물러서자 텐트 안에서 두 노인이 나왔다. 아마 젊은 사람들은 가축들을 몰고 초지로 나가고 노인 부부가 손자 둘과 함께 집을 지키고 있는 듯했다. 두 노인에게 공손하게 예를 갖춘 후 표정으로 나의 의도를 나타냈다. 카메라를 꺼내자 아이를 업고 있던 노인은 쑥스러운 듯 내 카메라를 바라봤다.
바람과 산맥이 어울려 노래하고 바위와 물이 부딪쳐 메아리를 만들며 사람과 땅이 정성껏 서로를 호응하니 초지를 따라 이슬이 내리고 마르기를 반복하는 이 고원에서 유목민들은 신과 땅에 의지하여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다만 히말라야 전 지역에 걸쳐 서로 자유롭게 통교하고 이동하며 살던 사람들이 인간의 욕심에 의해 국경선이라는 높은 담에 막혀 살게 된 것은 참으로 유감이었다. 나는 이들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무한한 동경심과 존경과 부러움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늘 부족하다면서 얻기만을 바라고 쓸데없는 번뇌를 머리맡에 놓아둔 채 살아온 나는 이들로부터 배우고 깨닫는 바가 많았다.
구릉을 어깨 너머에 두고 유목민 텐트 앞에 앉아 한참동안 휴식을 취했다. 주인은 내게 자꾸만 텐트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나는 선뜻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비록 그것이 텐트일망정 그들의 신성하고도 소중한 생활공간이었기에 불쑥 들어간다는 것이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청에 나는 공손히 예를 갖춘 후 조심스럽게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아! 큰 집에 수많은 물건을 쌓아놓고 사는 것이 과연 행복이란 말인가! 흙을 개어 만든 화덕과 돌을 흙과 섞어 쌓아 만든 침상, 구석구석에 놓여 있는 단출한 가재도구들은 가족이 최소한으로 살아갈 수 있는 필수품뿐이었다. 나는 그 안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식사를 하고 가라는 노파의 제의에 나는 얼른 출발해야 한다며 사양하고 나왔다. 두 노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뒤돌아섰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 노인이 내가 자전거를 끌고 내려가는 모습을 꼼짝도 하지 않고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뒤를 돌아보면 두 노인은 낯선 이방인과의 짧은 만남이 서운한 듯 손을 흔들었다.
고원의 마지막 재인 조질라패스를 목전에 두고 나는 자전거 위에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산 넘고 물 건넜다는 표현이 어찌 책에 있는 한가한 문장쯤으로 이해하겠는가.
무거운 등짐을 지고 높은 고개와 구릉, 가파른 계곡과 너른 평원을 달려왔다. 긴 구간을 여행하다보니 주변 물길의 방향이나 산세를 보며, 마침내 ‘지금 어디로 가고 있으며 앞으로는 이런 지형을 만날 수 있겠구나’라는 예측이 가능하게 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는 이곳을 지났을 법한 상인, 구법승, 군마와 농부들,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떠돌던 수많은 사람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큰 행복을 얻었고 격렬하게 뛰는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길옆으로 계속 이어지는 유목민 촌락만 보면 지체 없이 자전거를 끌고 방문했다. 낮에 성인들은 가축을 몰고 초지로 나가며 집을 지키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녀자들과 어린아이들이었다. 멀리서 내가 올라오는 모습을 본 유목민들은 일거에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바닥에 자전거를 눕혀 놓고 내 주변으로 모여든 사람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비록 이곳 사람들이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나의 인사 예법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정성을 다하는 내 모습을 어찌 잡아내지 못하겠는가.
그들과 얼굴이 틀리고 말이 다르니 짐작컨데 그들 식대로 표현하자면 동쪽의 먼 나라에서 온 이상한 여행자인 내가 신기하고 재미있었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 사람 한 사람 쳐다보면서 내 속에 있는 말을 가벼운 웃음으로 풀어냈다.
어떤 유목민 처자는 내 가까이 다가와서 옷을 만져보기도 하고, 또 다른 여인은 자기 집으로 가자는 표현도 했는데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왜냐하면 여기는 분명 이슬람 율법이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하도 여러 사람들이 나를 잡아끄는지라 나는 황망히 그 청들을 물리치고 우선 자리에 털썩 앉았다.
우울하며 아름다운 도시, 스리나가르
아이들은 성인들과 다르게 이방인을 대하는 데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너무 순진하고 귀여워 손이라도 한 번 잡으면 얼굴을 숨기는 등 나와 접촉하는 것을 매우 부끄러워했다.
일반적인 주거 형태인 천막은 주변으로 돌담을 쌓아 강풍과 우기에 빗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이곳의 겨울 추위가 매우 맹렬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대를 이어서 여기에 정착해 살아온 사람들이기에 내가 그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백 년 동안, 아니 수천 년 동안 이들은 추위와 더위, 그리고 눈과 비에 대응해 사는 방법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구름 한 무더기가 광대한 창공에 누워 있는 동안 나는 여행의 마지막에 안착했다. 여행을 통틀어 큰 자연의 변화무쌍함을 무너뜨리는 사건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 거대한 자연에 맞서 그것과 어깨를 맞대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살갗을 만져보고 숨소리를 들었으니 이것 또한 커다란 행복이었다. 이들에게 많이 생산하고 많이 팔아 부자가 된다는 말은 적당하지도 익숙하지도 않은 표현이었다. 양을 치고 농사를 짓는 것은 이들이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더 많이 갖거나 얻으려는 욕심은 내게 익숙한 단어일 뿐이었다.
겨울에 이 길을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의 풍경을 예측할 수는 없었지만 상상은 가능했다. 눈 쌓인 설산과 계곡으로 내달리는 물과 빙하에 깎인 능선과 가파른 계곡이 보였다. 나는 텐트촌을 나오다가 제자리에 멈춰 서서 태양으로부터 쏟아지는 환한 빛을 품고 있는 초지와 산봉우리, 계곡과 능선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마치 경전을 읽을 때처럼 한 구절을 읽고 익숙하게 사유하며 조심스럽게 그 뜻을 헤아리듯 주변의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내 심장 안에 넣었다.
이렇듯 평화로운 풍경은 모든 것이 다 원만하게 해결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런 평화 뒤에 웅크리고 있는 인간의 과도한 욕심이 쉽게 평화를 무너뜨린다. 이곳만 봐도 그렇다. 현재 인도와 중국, 파키스탄에 속한 라다크의 여러 지역이 옛날에는 서로 왕래하면서 물자를 교류하고 사는 방법을 공유하며 지혜를 서로 나누며 살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단절되어 있으니 자연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습관과 인정은 그야말로 인위적으로 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분화구로부터 튀어나오는 불꽃처럼 타올랐던 여행은 그 종착점에 다가올수록 그 세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심장의 고동은 점점 침착해지기 시작했으며 안에 감추었던 감흥들은 응고되어 머리 한편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 안에 저장된 내용들은 복잡하다가 때로 단순했으며 늘 지니고 있기에는 다소 무거웠다. 무거운 그늘을 걷어내듯 털어낸다면 과연 다음에는 어떤 여행 계획이 기다리고 있을까? 키 작은 풀이 촘촘하게 박힌 땅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나무 한 그루 없는 땅에서 오직 저 작은 들에 의지해 사는 유목민들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노래를 불러 주고 싶었다. 산 위로 달려가는 그림자를 쫓지 않아도 내 몸은 자전거가 끌고 가는 대로 길을 내달렸다.
조질라패스가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높이나 규모면에서 라다크 지역에서 넘었던 고개와는 비교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보이는 설산과 거친 굉음을 쏟아내며 흐르는 빙하가 녹은 물을 보며 여기가 스리나가르로 가기 전 마지막 고원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몸은 무겁지 않게, 마음은 평화로우면서도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것과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어긋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것은 분명한 나의 의무였으며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고원의 마지막인 조질라패스를 넘어 ‘소나마르그’로 내려가는 절벽에 이르자 깜짝 놀랐다. 수백 m에 이르는 급경사를 지그재그로 길을 냈는데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라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가기에도 현기증과 두려움이 일 정도로 가파르고 험했다. 말하자면 절벽에 매달린 길이라 할 만 했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산을 깎아 만든 길은 예술의 경지였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절벽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신중하게 자전거를 타는데도 평소와는 다르게 몹시 긴장했는지 핸들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하였다. 특히 반대편에서 오는 차라도 마주치게 되면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절벽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섰다. 운전사는 그런 내가 재미있었던지 경적을 울리거나 손을 흔들면서 내게 신호를 보냈다.
소나마르그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날 일찍 여행의 종착지인 스리나가르로 출발했다. 출발하는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오전 내내 약간 옷을 젖을 정도로 내렸다. 그간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굴곡이 있었지만 나는 목표한 대로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마침내 스리나가르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신께 기도를 드렸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의지와 행동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지만 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등을 때리고 이따금 낮게 날아가는 새들이 부르는 노래가 강하고도 명확하게 들려왔다. 스리나가르에 가까워질수록 200여 m 간격으로 무장 경찰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곳 카슈미르는 아직도 종교 간, 국가 간 분쟁이 끝나지 않은 곳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의 영혼이 이 라다크에 영원히 멈출 수는 없지만, 그리고 떠날 운명이었지만 나는 분명 얻은 바가 있었다. 깨달음이라는 표현은 너무도 과장되고 과분한 것이기에 그냥 아주 조금 뭔가를 얻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았다. 얼굴은 타다 못해 익어버렸고 체중은 8kg이나 빠졌으며 시력은 고글을 쓰지 않고 햇빛에 장시간 노출된 덕분에 극도로 약해져 있었다. 저녁에 스리나가르에 도착해 급히 숙소를 정한 후 여장을 풀었다.
그날 밤은 참으로 묘한 꿈을 꾸었는데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가는 꿈이었다. 큰 소리가 절벽에서 내려와 길을 찾고 있는 내게 방향을 알려 주기도 했다. 붙잡지 않았으나 문득 옆에 머무는 기운이 있었으며 지나온 길은 어느 곳은 희미하기도 하고 다른 곳은 선명했지만 지나온 마을과 만난 사람들이 모두 평등했다. 이것은 여행의 지극한 목표이고 또한 여행이 주는 기쁨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스리나가르는 들썩거리다가 침착하고 우울하면서도 아름다운 도시였다. <연재 끝>
※ 히말라야 자전거 여행에 필자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가능한 범주 안에서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triplemankr @hanmail.net> 원고료는 전액 장학금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음 달부터는 이남석 선생의 ‘가르왈 히말라야 900km 자전거 여행’이 연재될 예정입니다.